나루히토 일왕이 지난 5월8일 도쿄 황거 내 신사 ‘규추산덴’을 참배하고 있다.

일본 천황(天皇)은 애초에 다른 나라 군주보다 우월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한 칭호는 아닌 걸로 보인다. ‘왕중의 왕’이라는 의미의 우월적 군주에 대한 칭호로 중국에서는 황제(皇帝)가, 서양에서는 엠퍼러(Emperor)가 쓰였다. 모두 왕, 또는 엇비슷한 지위의 제후가 다스리는 복수의 민족과 국가 위에 군림하는 최고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다. 반면 일본 천황은 영어로 엠퍼러로 표기되지만, 일반적 황제의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비록 제후들이 패권을 다툰 중세시기가 있었다고는 하나, 체제로 보나 통치권역으로 보나 제각각 왕을 칭하기엔 모자랐고, 다민족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천황 호칭은 고대사회의 제사장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해 일본 토착 종교인 신토(神道)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교파의 대표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설도 있다. 메이지유신 때 일본 천황이 국가신토의 사실상 교주로 추대되며 신적 지위를 재확립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일리가 없지 않다. 다른 기원설로는 7세기 덴무 천황 때 중국 도교의 최고 신인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따와 천황을 칭했다는 얘기와, 중국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 당시 잠시 쓰인 천황 명칭을 수입했다는 주장도 있다.

▦ 어떤 경우든 자국의 군주를 존칭하는 일본 자체의 방식이었던 천황이 주변국의 반발을 사게 된 시점은 일제 때다.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기치로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던 일제는 세계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이념을 내세우며 천황제 파시즘과 황국사관을 구축했다. 그러니 천황이라는 호칭 자체가 그 이후 주변국에서는 일본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는 기제로 작동한 걸로 볼 수 있다.

▦ 1989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반일감정이 고조되면서 국내 대부분 언론은 일본 군주를 ‘일왕’으로 칭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김대중 정부 이래 ‘일본 내에서 사용하는 일반적 명칭을 그대로 호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 따라 ‘천황’을 공식 명칭으로 쓰고 있다. 사실 상대국의 정신문화 전통을 존중한다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젠 일왕 호칭 사용을 숙고할 때가 됐다고 본다. 안타까운 건 아베 정부의 경제 보복 때문에 일본의 새 군주 즉위식을 코앞에 둔 이번에도 그런 논의가 금기시되고 있는 현실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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