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예수가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한다면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사진은 9일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이 문재인 정부와 조국 법무부 장관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광화문광장 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한국일보 유튜브 영상 캡처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의견서’라는 대자보가 걸렸다. 주인공은 마르틴 루터 신부였다. 로마의 눈으로 보면 변방에서 일어난 해프닝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마침내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고 끝내 교회는 둘로 쪼개졌다.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이 말에는 기독교만 ‘종교’라는 함의를 갖는 위험을 내포한다), 유럽 교회의 개혁이었다.

정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개인의 신념이기 때문에 비평한다고 고칠 것도 아니고 감정만 상할 뿐 서로 불편해지는 결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피할 건 아니다. 이미 그런 상황이다. 왜 종교에 대해 시비하느냐 따지기 전에 어찌하여 그럴 수밖에 없는 지경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종교가 사회를 걱정한다며 착각하는 자들이 있다. 수구와 극우를 오가며 탐욕과 무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자들이 대형교회를 이끄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되먹지도 않은 말에 무조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신자들을 보면 참담하다. 자동응답기 같다. 희한하게도 그런 자들의 대형교회에 ‘멀쩡한’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이성을 갖고 있다면 그게 말이 되는지 알 텐데. 그 독설들이 반 복음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사람들조차 교회에서는 입 다무는 게 더 큰 문제다. 목회단상에서 말하는 것에 토를 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성범죄, 횡령, 세습 등 낯 뜨거운 타락의 행태에 대해서도 무조건 옹호한다. 신자들은 목회자들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순응한다. 만약 제2의 루터가 나오면 화형이라도 처할 기세다. 그러면서 복음을 어찌 전할 것이며 무슨 낯으로 사회를 바라볼 것인가. 소수의 일탈은 어느 조직에서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 소수가 사실은 대형교회라는 점에서 다수와 다르지 않다. 그게 문제다.

우리가 교육자와 성직자 그리고 언론인에게 상대적으로 큰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가 타락하고 일반시민들도 두려워서 함구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덜 때 묻은 그 사람들이 준엄하게 사회를 비판하고 심판할 수 있어야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종교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런 자격은 갖추고 있는지 냉엄하게 묻고 따져야 한다.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예수가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서 한다면 한국교회는 양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존재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500여 년 전 부패한 당시 교회에 용감히 맞섰던 개혁의 주체가 개신교회들이었다. 그러나 과연 지금 그런 의지가 있는지, 여전히 그 후계자인지 고민해야 한다.

정치적 목적의 집회와 의도적으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모여 ‘상호부조’하는 방식으로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세를 과시한다. 유명(?) 목사들이 단상에 올라 도덕과 인격의 회복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편협한 소신을 위험한 정치적 발언으로 도배한다. 거기에 정치인도 거들고 나선다. 성조기가 나부끼고 이스라엘 국기까지 휘날린다. 그들에게 빌붙는 정치세력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인원을 동원하고 세력을 과시하기에 이들보다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위험한 야합이다. 그런데도 그걸 비판하는 신자들이 많지 않다. 오히려 세를 과시했다고 만족해한다.

세습에 대해 교단의 재판국이 불가 판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그것을 뒤집은 사례는 요설과 궤변을 넘어 힘만 쥐고 있으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야만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북한의 권력세습과 재벌의 세습을 비판할 수 있는가. 종교는,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월등하게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세속과 상식보다 훨씬 더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며 기득권의 옹호에만 몰두할 때 500여 년 전 루터에 의해 그랬듯이 개혁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같은 편’인 루터 신부가 개혁을 요구했을 때 묵살하고 무시했으며 탄압했다. 엉덩이에 뿔 난 못된 송아지쯤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루터의 용기와 투쟁이 없었다면 로마교회는 더욱 부패해서 스스로 무너졌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교회는 루터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게 역사에서 배울 반면교사다. 한국교회는 성대하게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만 할 게 아니라 진정 개혁의 주체일 수 있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했어야 한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걸 무조건 꺼리고 두려워할 게 아니다. 이미 사회적 문제다.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그 침묵과 방관이 교회 외면을 넘어 붕괴의 동조자가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언자는 사라지고 제사장만 군림하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제2의 루터를 맞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공동번역 루가 21, 6)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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