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비핵화 실무협상을 마친 후 북한대사관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스톡홀름=박지연 기자

북한이 ‘결렬’ 강수를 둔 것은 초기 허들을 높이고 요구사항의 최대치를 제시함으로써 하노이 치욕을 설욕하고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겠다는 계획된 ‘결렬’로도 읽을 수 있다. 책임과 공을 미국에 넘기고 연말 시한으로 압박함으로써 트럼프 협상팀을 구석에 몰아 협상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술 차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성명과 담화 내용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기조는 미국의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실망감, 6월 30일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 이후 자신의 뜻을 전혀 미국이 반영하지 않았다는 좌절감이다. 북한의 성명과 담화는 이 ‘창의적 제안’에 대한 반응이자 자신들이 견지하고 있는 협상전략을 보여 줬다.

북한이 북미 실무 협상 직후 내놓은 성명과 담화는 유독 ‘안전 보장’을 힘주어 강조했다. 완전한 비핵화는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이 깨끗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위 ‘새로운 계산법’의 핵심이 ‘비핵화 대 안전 보장’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협상 직후 ‘안전 보장’에 대한 거친 강조를 해야만 했을까.

김명길 북한 협상 대표 성명 중 한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위협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먼저 핵 억제력을 포기해야 생존권과 발전권이 보장된다는 주장은 말 앞에 수레를 놓아야 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라고 발언한 부분이다. 미국이 ‘선 비핵화’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야 생존권ㆍ발전권을 보장할 상응조치를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미국의 ‘창의적 아이디어’는 직접적 ‘안전 보장’보다는 경제적 번영이나 밝은 미래와 같은 ‘약속’(계획) 아이템에 방점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를 “새로운 계획”이라고 했다. 당장 주고받을 구체적 조치보다는 향후 실현할 ‘청사진’ 또는 ‘약속’의 개념이 강할 수 있다.

반면 비핵화에 대해서는 초기 포괄적 비핵화 합의와 핵ㆍ미사일(ICBM, IRBM) 시설과 생산의 동결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노이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미국이 “기존 입장을 고집”하는 “낡은 각본”을 들고 “아무런 타산이나 담보도 없이” “막연한 주장”을 했다고 했다. 북한은 미국이 ‘비핵화 대 안전보장’이라는 교환구도, 기본 셈법 자체를 무시하고 있고 ‘선 비핵화’란 구태의연한 태도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북한은 이번 실무협상을 등가성ㆍ공정성에 기초한 교환구도, 단계적 진행의 틀, 소위 ‘새로운 계산법’을 미국이 제대로 인식하고 상응 조치를 준비해 왔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신뢰구축 조치 이행, 안전 보장(대북 적대시정책 철회)에 대한 포괄적 이행 확약, 단계적인 교환 등이다. 반면 미국은 싱가포르 공동성명 4개항 각각에 들어갈 아이템을 추가적으로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여기에 비핵화 사안은 ‘집중적 논의’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미국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교환구도의 공정한 틀을 만드는 내용이 아니라, 기존 선 비핵화 요구를 중심에 놓고 몇 개의 아이템을 보상처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봤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과연 북한의 ‘안전보장’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가지고 협상에 임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핵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만큼 북한이 원하는 ‘안전 보장’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협상 전술상 북한에 대한 ‘안전 보장’ 내용을 가능한 수준에서 보다 풍부하게 준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북미 협상,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성공조건이 될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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