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17)]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 탐험 3편
한 여행지의 인상은 하루 중 어느 때에 보느냐에 못지않게 방향으로도 결정된다. 특히 단순히 들러보는 게 아니라 ‘탐험’이라는 적극성이 가미될 땐 더욱더 그렇다. 페트라는 어차피 시간이 한정된 여행자가 다 보기에는 무리다. 좀 더 다른 얼굴, 그 속살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서는 작전이 필요했다.
페트라엔 ‘정식’ 주차장이 두 곳이다. 하나는 방문자센터 앞이요, 다른 하나는 페트라를 에두르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난 주차장이다. 오늘의 출발점은 후자다. 주 탐방로에서 가지치기한 트레일을 걷기 위해서다. 은유적으론 ‘산 넘고 물 건너는’ 고된 여정이지만, 사실 물 한 방울 없는 바위산을 타야 하는 길이다. 오늘도 날씨는 지독히 맑다. 물기 없는 모래처럼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조여 왔다. 사막 유목민인 베두인족은 늘 이런 길을 나섰겠지? 이런 삶도 계속되면 내성이 생길까, 과연 익숙해지기나 하는 걸까?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어쨌든 새로운 아침이었다.
초입은 아스팔트가 깔린 내리막길이다. 출입문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으로 선명한 비포장 트레일이 보였다. 구불구불 하강하는 아스팔트와 달리 가볍게 오르는 길이다. 출입문에서 호객하던 당나귀 소년이 왜 아스팔트 길을 고집하는지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트레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위산 페트라의 명성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제대로 느끼게 된다. 늘 위로만 보였던 여러 암벽의 물결이 발아래에 펼쳐진다. 먼 거리에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그나마 페트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안심할 뿐이다. 광활하다. 어제의 페트라를 눈 아래 둔다. 이런 오지에서 상거래를 튼 나바테아인의 자신감에 격한 찬사를 거듭했다.
계속되는 암벽의 고통 속에서 다시 트레일인가 싶어 따라갔다. 어김없이 낭떠러지다. 진입로부터 이미 페트라의 주 탐방로보다 높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어디로 내려가야 하지? ‘조금 덜’ 낭떠러지인 곳으로 겨우 몸의 균형을 잡으며 내려갔다. 왕가의 무덤 중 궁전 무덤 앞 즈음이다. 여행객의 발길이 뜸한 이곳에서 베두인족의 삶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개방된 동굴 앞에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철조망이 쳐 있고, 빨래가 애처로이 널려 있었다. 불을 피워 동굴 천장은 새까맣다. 페트라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그들 입장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이 인류의 유산을 훼손(?)하면서 이곳에 계속 살아도 되는가 하는 판단은 일단 유보했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다.
나와 다른 길로 ‘마이웨이’를 하던 탕탕을 항아리 무덤과 주 탐방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듣자 하니, 탕탕이 ‘만든’ 길이 더 쉬워 보였다. 선자처럼 바위산을 묵묵히 걸었고, 네 발을 동원하는 불상사는 없었다고 했다. 이 지점에서 위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걸으면 ‘비잔틴교회’에 닿는다. 5세기 후반에 지어진 비잔틴교회는 유난히 상흔이 많았다. 화재로 불탔고 지진에 망가졌다. 현재 잔존하는 교회는 작은 박물관처럼 단장한 모습이다. 계절의 추이와 동식물, 인물 등이 선명하게 새겨진 모자이크를 한참 동안 구경했다. 어찌 넌 그 오랜 시간을 버텨 왔을까.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오늘 페트라의 반쪽 여정은 비잔틴교회 맞은편 ‘희생의 트레일(Sacrifice Trail)’이다. 방문자센터에서 받아온 지도는 별 소용이 없었다. 이쪽으로 가면 저쪽과 연결되는 길이 있다는 지침만 얻을 뿐, 명확히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정보가 전무한 까닭이다. 도로명이나 지표가 될 상점도 없었다. 그저 바람에 희미해진 트레일을 걸으며 길이 없으면 만들어가면 된다는 의지를 북돋운다. 우리는 ‘대사원(Great Temple complex)’ 옆길로 올라 ‘희생의 제단(High place of Sacrifice)’에 들린 뒤 주 탐방로의 파사드 거리로 나갈 계획이었다. 고백하건대, 걷는 내내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드데이르로 가는 산행에 맞먹는 오르막길이었다. 지도는 너무나 평면이었고 실제는 거친 입체였다. 몰라서 참 용감했다. 이 길에 이방인은 오직 우리 둘뿐, 이따금 베두인족의 시선과 마주치고 염소 떼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희생의 트레일은 와디 알파라사(Wadi al Farasa)를 관통한다. ‘와디’는 ‘협곡’이란 뜻의 아랍어다. 의역하자면, 무릎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하는 하이킹 코스다. 이름도 없는 여러 무덤을 거쳐 트레일이 계단으로 변할 때에야 비로소 분명한 지표가 나온다. 스펙터클한 탐험 영화(페트라는 실제 ‘인디애나 존스’ 촬영지다)에나 나올 통로 사이로 오르막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기원전 200부터 기원후 200년까지 기능한 ‘정원 홀’과 ‘사자상 분수’가 이어진다. 두 건축물 모두 물과 관련이 깊다. 한때 정원이 있었을 거라 짐작되는 정원 홀의 오른쪽 구멍은 근처 저수조에서 물을 공급하고, 사자상 분수는 사자 머리 위 수로로 물을 물탱크로 흘려 보내는 기능을 했다. 나바테아인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물을 지혜롭게 잘 다뤘다. 지진이 모든 것을 쓰러뜨리기 전까지 일이다.
좀 더 오른다. 나바테아인 가운데 비만은 없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좁은 계단이 이어졌는데, 오를수록 바위산도 제대로 폼을 잡았다. 종종 풍화된 암벽에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도 한다. 저기가 정상이라고 희망할 즈음 또 다른 바위산이 나타나 털썩 주저앉기도 했다. 머릿속이 하얘질 즈음 정상에 닿았다. 우측으로 두 개의 오벨리스크가 보였다. 약 7m 높이로, 페트라의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풍요를 상징하는 나바테아인 최고의 신 두샤라(Dushara)와 여신 알루자(Al Uzza)다. 감히 도전하느냐는 듯 뿔처럼 높이 치솟아 있다.
“저기로 내려갈 수 있어요. 이 내리막길보다 더 쉬워요. 주 탐방로로 연결되는 길엔 계단이 많거든요.”
오벨리스크를 지나 ‘희생의 제단’으로 오르는데, 한 소녀가 길잡이로 따라붙었다. 우린 많이 지쳐 있었다. ‘쉽다’는 한마디에 바로 끌렸다. 희생의 제단에서 내려와 반대편으로 걷는 그녀를 졸졸 따라갔다. 이거 어째, 절벽으로 간다. 큰 요르단 국기가 나부끼는 곳에 가서야 깡마른 몸의 소녀가 섰다. 명당이다. 꽤 냉기 있는 바람이 불었다. 우측으로 왕가 무덤에 이어 페트라 근처 시내인 와디 무사(Wadi Musa)까지 보여 눈이 개운해진다. 좌측으론 암벽에 몸을 숨긴 아드데이르가 꼭지점처럼 보였다. 이미 페트라에 반했지만, 또 반했다. 위험한 곳에서 만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랄까. 떨어지면 뼈도 추스르지 못할 지점이었다.
‘쉬운’ 길 대신 명당만 소개한 소녀와 헤어져 이정표를 따라갔다. 주 탐방로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계단이다. 거대한 암벽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기에 시야도 풍경도 대단히 좁았다. 살아서 내려왔고, 오아시스로 진격했다. ‘와이낫(why not)’이란 이름의 상점이다. 희생의 트레일에는 상점이 드물어 여행자에게도 희생을 요구한다. 중동에서 최고의 커피를 판다는 곳에서 물을 마셨다. 이제 처음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차장으로 안내할 아스팔트 도로는 이미 바닥난 사기를 뿌리 뽑을 만큼 구불구불 길고 높아 보였다. 지금은 오후 6시. 앞선 당나귀가 엉덩이를 쌜룩쌜룩 흔들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죽기 전에 타볼까.
글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사진 엘베 가이야드 @rve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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