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땐 오스만제국에 대항, 연합군이 독립 약속했다가 파기
시리아 내전에선 미군 대신해 IS격퇴 수행했지만 결국 버림받아
“영토와 정체성을 얻기 위한 100년의 투쟁”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10일(현지시간) “쿠르드인들은 ‘산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격언을 다시금 떠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축출의 최선봉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감수하고도 미국에 버림 받고, 앙숙 터키의 공격에 직면한 신세가 배신으로 얼룩진 쿠르드 역사를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다.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족 침공은 이처럼 ‘구원(舊怨)’의 역사에 기반한다. 쿠르드족은 세계 최대 무국적 민족이다. 기원전부터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5개 나라의 국경 산악지대에서 유목을 하며 살았는데, 그 수가 3,000만~4,000만명을 헤아린다. 이 중 1,500만명이 시리아와 접한 터키 동남부에 거주한다. 터키 전체 인구의 19%나 차지하지만 인종도 다르고 고유 언어를 사용할 만큼 이질적이다. 이런 막대한 덩치는 터키가 쿠르드족에 두려움을 느끼는 배경이 됐다. 미 CNN방송은 “지금껏 터키는 쿠르드족을 소수민족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싹텄다. 당시 연합국 일원으로 오스만제국(터키 전신)에 대항한 쿠르드족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독립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서방은 3년 만에 약속을 뒤집었고 이후 독립국 ‘쿠르디스탄’ 건설은 쿠르드족의 지상 과제가 됐다.
1970년대 말 쿠르드노동자당(PKK) 등장과 함께 터키는 쿠르드족을 실체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쿠르드 분리ㆍ독립을 주장하는 PKK의 무장 투쟁으로 지금까지 희생된 사람만 3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르크 근본주의’를 앞세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예 “제거가 궁극적 목표”라고 공언할 정도로 PKK는 터키의 주적 취급을 받고 있다.
2011년 중동ㆍ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은 터키 정부가 쿠르드족 강경진압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됐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는 수도 다마스쿠스를 지키기 위해 시리아 북동부 통제를 포기했고, 2004년부터 이 곳에 터를 잡은 쿠르드 인민수비대(YPG)가 사실상 자치정부 노릇을 해 왔다. 문제는 터키가 YPG를 PKK의 군사조직으로 본다는 점이다. 터키 정부는 시리아 국경 지역을 장악한 YPG가 내부의 PKK와 합세해 실력 행사에 나서는 상황, 다시 말해 군사력과 정치가 결합할 경우 터키의 국가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을 염려한다. 미 뉴욕타임스는 “터키의 군사작전은 본질적으로 내부 분쟁과 연관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에르도안 정권은 전면전을 미뤄 왔다. 2014년부터 YPG가 주축이 된 시리아민주군(SDF)이 미군을 대신해 IS 격퇴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SDF가 IS를 시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터키의 조급증은 극에 달했다. 지난달 시리아 북동부 국경에 길이 480㎞, 폭 32㎞ 규모의 ‘안전지대’ 설치를 제안한 것도, 자국 내 시리아 난민 100만명을 완충지역에 이주시켜 YPG와 PKK의 연계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노림수였다.
결과적으로 미군이란 걸림돌이 사라지자마자 터키는 독자 행동에 들어갔다. 대신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튈 조짐이다. 영국 BBC방송은 “터키 공격으로 SDF 수용소에 갇힌 IS 조직원 1만2,000명이 혼란을 틈타 재무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테러 척결을 쿠르드족 공격 명분으로 삼았지만 오히려 테러리즘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이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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