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무역전쟁 도발로 100일 넘게 대립해 온 한일 양국이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달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나루히토(徳仁) 일왕의 즉위의식이 분기점이다. ‘지일파’ 이낙연 국무총리의 참석이 유력하게 거론되면서 양국 관계 개선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연말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가해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우리 법원의 현금화 조치가 단행될 전망인데, 일왕 즉위의식은 그 전에 분위기를 바꿀 마지막 기회로 꼽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양국 관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는 역설적으로 낙관적 기대를 높이는 요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할 것이라는 관측도 일부 있었지만, 불참 쪽으로 정리됐다고 한다. 일본이 태도를 바꿀 조짐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을 맞이하는 일본 태도에 따라 한일 관계가 오히려 더 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이 얼마 전부터 ‘이 총리의 즉위의식 참석’을 띄운 것을 놓고 ‘문 대통령은 참석하지 말라’는 일본 정부 메시지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었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로는 “우리측 참석자는 물론이고 참석할지 여부도 확정되지 않았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이 총리가 특사 자격으로 참석하는 것에 무게를 싣고 있다. 약 30년 만에 열리는 일왕 즉위의식이 일본 국민에게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만큼, 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참석해 한일 갈등 해결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에서다.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왕 즉위의식에 강영훈 당시 총리 부부가 참석한 전례도 있다.
이 총리는 진작부터 즉위의식 참석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총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측근을 비롯한 일본 정ㆍ재계 인사, 학자 등과 다양한 채널로 비공식 접촉을 해 왔다. 1990년대 초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등을 지낸 이 총리는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지일파로 꼽힌다.
이 총리가 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즉위의식에 참석한 뒤 아베 총리와 만날 가능성에 여권은 기대를 걸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면 지난해 말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양국간 최고위급 공식 대화가 된다. 이 총리가 아베 총리를 만나 한일 정상회담을 협의한다면 유의미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일 문제는 한일 정상 간에만 해결할 수 있다”며 “파국에 가까운 상황으로 변하기 전에 문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생각을 친서 등 형태로 일본에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양국 모두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그 동안 대화 부재로 인한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며 “일본 파견되는 특사가 일본 언론과 적극적 인터뷰를 통해 보통 일본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물론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한 한일 외교가 최상의 시나리오로 전개된다 해도, 양국 관계가 단번에 풀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법원 배상 판결 효력을 둘러싼 공방, 양국이 주고 받은 수출 규제, 한일 갈등의 뿌리인 과거사 인식 차가 좀처럼 좁혀질 수 없다는 점도 한계다. 이에 청와대가 특사의 급을 낮춰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나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을 보낼 가능성도 거론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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