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학문공동체의 위기] <4> 전문가 대담ㆍ대학의 앞날을 묻다
외형은 키웠지만 내실은 무너졌다. 2019년 한국의 대학들은 ‘학문의 전당’이라 부르기 어려워졌다. 한국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한다는 건, 취업 미루기 수단이거나 챙겨 두면 좋은 스펙 정도일 뿐이다. 노벨상 수상 시즌인 10월이면 어김없이 ‘우리는 왜’라는 한탄이 쏟아지지만, 지금 같은 구조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수상자가 나오기 어렵다.
한국 대학은 어디로 가야 할까.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연구자협의회의 상임공동의장 강명숙 배재대 교수, 한국비정규직교수노조 수석부위원장 이상룡 부산대 강사, 전국대학원생노조 지부장 구슬아 성균관대 비교문화협동과정 대학원생이 지난 7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머리를 맞댔다.
◇2023년부터 학생수 급감… 해고 폭풍 막을 ‘강사법 이후’ 필요
-9년간 유예된 고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강사법이 8월 시행에 들어갔다. 당장 이번 학기부터 ‘강사 공개채용’이 시작됐다.
강명숙 상임공동의장(이하 ‘강’)=“공개채용이지만 공채라 할 만한 시스템은 갖추지 못했다. ‘보편적 채용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 학교별, 학과별 자의적 기준으로 강사를 뽑고 있다. 학벌, 논문개수 같은 정량적 스펙만 따지는 수준이다.”
이상룡 수석부위원장(이하 ‘이’)=“맞다. 사실상 무력화된 공채다. 말씀하신 대로 당초 교육부는 강사 지원 서류를 표준화한 보편적 채용기준을 마련하려 했다. 일부 사립대가 ‘알아서 하겠다’는 바람에 판이 깨졌다. 그럼에도 공채 자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교수 인맥으로 알음알음 강사를 꽂아 넣는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공채는 꼭 필요하다. 그 다음 채용 원칙을 세워야 한다. 강의 경력만 본다면 강사는 영원히 강의만 해야 한다. 전임교원을 뽑을 때처럼 연구자로서의 자질도 따져봐야 한다. 강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노동자’를 넘어 ‘학문후속세대’기도 하니까.”
-이번 공채로 강사들은 대량 해고를 맞았다. 대학이 추가 공채를 할까.
이=“강사법과 맞물린 대량 해고가 이미 두 차례 있었다. 강사법이 유예된 2011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그리고 올해 상반기. 거기에 이어 이번에 3차 해고가 있었는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앞선 두 차례가 대학본부 주도라면, 이번엔 대학 교수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행했다는 점이다. 학내 권력 유지를 위한 선택이었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추가 공채는 없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2023년부터는 학생 수 자체가 줄어든다. 그 때는 ‘학살’ 수준의 대량해고가 예정돼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부터 대비책 만들지 않으면 강사법의 파장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강=“교수 또한 부담이다. 한 강사에게 3년 강의를 보장해주는 게 어려운 시대다. 학생도 줄지만, 기초학문 전공자는 더 빠르게 줄어든다. 학생 수를 못 채워 강의가 폐지되는 경우가 늘다 보니 교수 입장에서도 자신이 홀로 강의를 다 떠안거나, 아예 강의 자체를 개설하지 않는 보수적 선택을 한다. 결과적으로 강의 질이 떨어지면 학생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
-강사법 이후, 뭘 대비해야 하나.
강=“교육부가 자세를 바꿔야 한다. 예산이나 사업 지원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대학에다가 맡기면 대학은 편법만 쓸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강사 공채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정부 감독 아래 ‘강사 데이터 베이스’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전공, 경력, 강의 가능 지역 등을 입력해 하나의 시스템에서 통합 관리하고 이를 공개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강사 일자리를 적극 마련하고 전임교원이 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필요한 방안이지만 사업 계획에만 몇 년이 흘러갈 것 같다. 강사들은 그 사이 죽어나간다. 당장은 ‘방학 중 임금’ 보장 문제가 절박하다. 방학이 총 22주인데 정부에서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4주분만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한 달에 1,000원을 주더라도 22주 내내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일단 12개월 간 월급이 계속 지급되는 틀을 만들어 놔야 강사에게 정기적 기본급을 줄 수 있는 법적 토대가 형성된다.”
구슬아 지부장(이하 ‘구’)= “그래서 강사들이 노조를 해야 한다. 대학이 자발적으로 강사를 늘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교원’이 늘면 관리에 부담이 생기니까 강사까지 교원 지위를 얻는 것이 싫은 거다. 싫건 좋건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강사들은 이런저런 바람에 휩쓸려 내려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무급으로 부려먹는 대학원생, 노동자로 봐야
-대학원생 처우 개선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구=“정부나 기업이 발주하는 ‘연구 과제’를 많이 따오는 게 학과 입장에선 유리하긴 하다. 하지만 관련 업무 부담은 대학원생에게만 쏠린다. 학교는 연구실을 ‘교수의 성역’으로 간주해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학원생이 연구도 하고, 보고서도 쓰고, 온갖 행정 잡무까지 처리하는 만능 인력이 되는 거다. 그러면서도 교수들은 대학원생들을 ‘동등한 연구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연구실에서 교수는 ‘영주’고 대학원생은 ‘농노’인 구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외국은 행정 전담 정규직 직원이 별도로 있다.”
강=“연구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산학협력단’ 운영을 보면 주먹구구가 따로 없다. 연구를 전체적으로 관리, 감독, 지원할 정규직 직원이 없다. 그러니 그 업무를 대학원생들이 ‘무급’으로 짊어지고 있다. 해법은 간단하다. 대학본부가 정규직을 채용하면 된다. 이건 대학본부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본다.”
구=“교수는 연구실 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사람 수’부터 늘리려 한다. 그러다 보니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대학원생을 많이 받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 대학원생 인건비, 노동조건 같은 문제는 연구실이 아닌 대학본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교수 부담도 줄어든다. 교수는 본디 강의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인데, 요즘은 거의 ‘중소기업 사장’꼴이다. 연구에 집중하도록 도와야 한다.”
-의료보험 산재보험 등도 없다고 들었다.
구=“전 아직 아버지 밑에 들어가있지만 대학원생들 중엔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20대 후반, 30대 중반 한창때를 4대보험 없이, 제대로 된 저축도 없이 버텨야 한다. 그러고 난 뒤 40대가 되면 주택청약도, 보험도, 국민연금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게 대학원생들의 운명이다.”
강=”그러니까 연구자들을 노동자로 간주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적어도 기초생활보장만이라도 챙겨볼 수 있으니까. ‘교수가 못 돼서 풍족하진 않더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공부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지내겠다’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학술연구교수’ 같은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조국 딸 ‘의학논문 1저자’ 의혹 같은, 연구 부정 문제도 흔하다 들었다.
구=“연구 부정 문제는 늘 있는 일이다. 외국 대학의 경우는 중요한 실험 일부를 외주로 돌린다. 실험만을 맡는 전담 인력을 따로 두기도 한다. 실험을 설계하는 이와 데이터를 추출하는 이를 분리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국은 대학원생 노동력이 워낙 값싸니까 연구실에서 직접 실험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참여하니 누구 한 명 이름 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교수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대학원생들이 알아서 데이터를 만지기도 한다. 혹시 문제가 있다 해도 학교 내부에서 구성되는 연구윤리위원회가 이를 문제 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객관적 상호 검증이 어려운 분위기다. 우선은 연구 윤리 문제를 고발한 대학원생들이 학업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게 전혀 안 되고 있다.”
-‘학문후속세대’가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나.
강=“가장 큰 문제는 ‘삶의 지속가능성’이다. 연구 프로젝트에 동원돼도 제대로 된 임금조차 받지 못한다. 자기 통장으로 들어온 인건비를 빼내 연구실에다 내는 ‘턴백(Turn back)’이 관행처럼 굳어있다. 연구실 운영비를 왜 대학원생이 내나.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지급되는 연구지원금에서 일정 부분을 연구실 운영비로 따로 떼어두면 된다. 많은 교수들이 그걸 사적으로 유용한다는 게 문제다. 공부도 먹고 살아야 할 수 있다.”
구=“연구자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전문연구기관이 부족해서이기도 하다. 대학에 적을 두지 않고 연구한다는 건 한국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인문사회계열은 더 그렇다. 당장 실용성이 없어도 연구결과물은 사회적 공공재로 충분히 생산되고 유통돼야 한다. 모두가 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건강한 판단 능력을 가진 시민이 될 필요는 있다. 대학은 바로 그런 시민들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그래서 인문학자들이 필요하다.”
◇‘학술정책’조차 없는 인문사회계열
-인문한국(HK) 같은 인문사회계열 학술진흥정책은 꾸준히 있어왔다.
이=“인문학 특성을 살려야 한다. 가령 HK는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 인문학 분야에서 5년 이상 걸리는 대형 프로젝트는 드물다. 당장 내년부터 ‘인문사회연구교수’ 제도가 시행되는데 ‘장기 5년, 단기 1년’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개별 연구자 위주로, 단기적 지원이 더 낫다. 가장 단순하게는 논문 쓰는 대로 지원금을 주면 된다. 열심히 쓰는 사람은 저절로 장기 지원을 받는 셈이다.”
강=“우리나라의 인구대비 연구개발(R&D) 투자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인데, 인문사회계열 투자 비중은 너무 적다. 당장 눈 앞에 똑 떨어지는 연구결과를 내놓기 어려운 인문사회계열은 이공계의 성과 위주 지원 방안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다. 교육부 차원에서 인문사회계열 학술 전담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과 강사,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자들로 구성된 학술원에서 학술 정책의 큰 그림을 내놓도록 해야 한다.”
-학술 전담 학술정책기구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으나 구체화된 것은 없다.
강=“공영형 사립대, 국공립대 네트워크, 비정규교수문제 등 문재인 대통령의 고등교육 관련 공약 가운데 실현된 게 없다. 굳이 꼽자면 국립대 지원 정도? 더군다나 고등교육 관련 공약을 들여다보면 인문사회 학술진흥정책에 관련된 내용은 아예 없다. 학술정책기구 설치는 교육부가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 ‘고등교육 학술원 TF’라도 만들어 중장기적인 밑그림이라도 그려야 한다. 1차적으로는 그런 논의 단계를 만들어야 하고, 이 논의가 고등교육 전체 혁신 정책과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
이=“여러 측면이 함께 있다. 관료들의 권력을 내려놓긴 쉽진 않은 부분도 있고, 한국 사회에서 민간 영역에 대한 신뢰성도 그리 높지 못하다. 원론적으로는 학술 전문가들이 학술 정책을 짜는 것이 맞겠지만, 학계가 먼저 자정 능력을 보여주면서 신뢰성을 얻을 노력부터 해야 한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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