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은 별개 얘기다. 서초동 집회에 그 많은 인파가 모인 것도 조국 수호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검찰 개혁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빼놓으면 설명하기 힘들다. 지금의 검찰 개혁 요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인 검찰에 대한 여권의 복수’라는 프레임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뿌리가 깊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수사권 남용을 촘촘하게 규제하고 있는 건 언제든 잠재적 피의자로 전락할 수 있는 국민이 수사기관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 막강한 수사기관이 독점적 기소권을 날개 삼아 법조 카르텔까지 형성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해왔다. 검찰이 문민정부 이후 최고 권력기관으로 올라선 지 줄잡아 25년이 됐다. 먼지떨이 수사나 표적 수사를 당해 본 기업인이나 정치인은 물론이고, 고작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청 문턱을 넘어본 사람들조차 검찰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임계점에 달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어젠 윤석열, 오늘은 조국 식으로 검찰과 법무부가 경쟁적으로 검찰 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각자가 처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목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보다 근본적인 처방은 무엇일까. 역사학자 이덕일의 책 ‘칼날 위의 역사’ 가운데 오늘날의 검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사헌부를 다룬 대목에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먼저 엄격한 자기 절제. 과거 사헌부도 검찰 못지않게 위세가 대단했다. 차이점은 사헌부의 권위는 국가가 부여한 막강한 권한뿐만 아니라 사헌부 관료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조정 회의가 열리면 사헌부 관료들은 가장 먼저 들어갔다가 가장 늦게 나왔다. 다른 관료들과 어울려 회의에 드나드는 동안 청탁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은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사헌부를 두려워한 것은 자기 기관의 수장도 거침없이 비판하는 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 2년 이점(李坫)이 대사헌이 되자 “연산군에게 아첨해 꿩을 헌납한 자”라는 이유로 탄핵한 기관은 다름 아닌 사헌부였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본인에게 털끝만한 하자라도 있을 경우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피혐(避嫌)이고, 친족이 유관 부서에 배치되면 둘 중 한 사람은 사직하는 것이 상피(相避)였다.
나머지 하나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권력 운용의 기술이다. 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왕명 사건을 수사하는 의금부와 지금의 경찰 격인 포도청은 물론이고 서울시에 해당하는 한성부와 법무부인 형조에도 수사권이 있었다. 사헌부가 ‘봐주기 수사’를 하면 의금부와 형조가 재수사에 나서는 구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사헌부와 사간원, 즉 대간(臺諫)의 인사권을 제도적으로 독립시켰다는 점이다. 대간의 인사권만은 이조판서(장관)나 이조참판(차관)이 아니라 국장 격인 이조전랑에 주었고, 후임 이조전랑 인사권은 전임 이조전랑이 행사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덕일은 “조선이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50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던 이런 국가 운용의 지혜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검찰의 과도한 힘을 빼는 것은 맞다. 하지만 ‘검찰춘장’같은 조롱으로 거악이 두려워할 추상같은 기상마저 없애는 건 곤란하다. 선출 받지 않은 권력인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도 필요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검찰권 행사를 위해선 권력으로부터 제도적 독립도 필요하다는 걸 ‘조국 수사’는 보여준다.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타오른 촛불은 검찰의 잘못과, 검찰을 운용하는 정권의 잘못을 동시에 질타한다. 모순되는 듯한 두 이슈를 한번에 해결할 지혜가 절실하다. 조국 장관은 또 다른 문제다. 설령 법 위반은 아니더라도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훼손한 그가 피혐과 상피로 대표되는 공직 기강을 세울 수 있을까. 인사권자가 이 상식적 질문에 답하지 않으니 검찰 개혁은 광장의 구호로만 맴돌고, 사회는 점점 ‘조국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
김영화 정치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