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비까지 흠뻑 내리고 나니 가을은 더욱더 깊어질 듯합니다. 가을은 단풍 들어 준비하며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마감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한 해 동안 쏟아낸 노고들이 모아 열매 맺는, 그리고 씨앗에서 움틀 다음 해를,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기약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열매와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열매는 씨방(또는 자방)이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때론 꽃받침통과 같은 씨방 주위의 위 식물기관들이 함께 성숙하기도 하지요. 콩꼬투리는 열매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콩은 씨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앵두나 버찌의 경우는 열매인데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부분을 식물학적으로는 핵이라고 부르며 씨앗에 속열매 껍질이 붙어 딱딱해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참 열매를 길바닥에 떨구어 냄새를 피우고 있는 은행나무는 얼핏 모양은 버찌 같지만 조금 복잡합니다. 식물학적으로 은행(銀杏)나무는 살구색 나는 물컹한 부분까지 다 합쳐서 열매가 아닌 씨라고 하지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열매를 영어로 후르트(Fruit)이라고 한다면 이 용어의 정의는 속씨식물의 씨방이 자라서 된 기관이므로 은행나무나 소나무와 같은 겉씨식물은 씨방이 없으니 열매, 아니 식물용어로 후르트는 생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소나무의 경우도 우리가 흔히 솔방울이 열매이고 씨앗은 그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틀렸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가을에 추수하고 봄에 파종하는 볍씨는 씨앗이 아니라 열매의 껍질이 붙어 있는 형태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열매와 씨의 경우뿐 아니라 이런 혼란은 알고 보면 곳곳에 나타나는데 꽃, 플라워(flower)의 식물학적 정의는 역시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이므로 겉씨식물인 소나무의 송홧가루 날리고 솔방울을 맺는 이 기관을 소나무의 수꽃 또는 암꽃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나무는 트리(tree)인데 식물용어로는 교목 즉 큰키나무를 말하니 작은키나무(shrub)도 그리 부르는 것은 고민입니다.
이런 혼란이 왜 생겼나 생각해보면 열매, 씨, 꽃과 같은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우리말이 품고 있는 의미와 범주가 있는데 이를 서양식 혹은 일본식 식물용어에 적용하면서 생긴 어려움인 듯합니다. 과학용어는 정확한 정의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보편화되어 국민들이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일반적인 부분은 소나무나 은행나무와 같은 겉씨식물의 경우는 꽃 혹은 열매라고 부르는 것을 무조건 틀렸다는 비판 대신, 자성구화수, 웅성구화수라고 하는 부르기도 어려운 일본식 한자용어들 대신, 우리말 용어를 정의하는 범주를 깊이 고민하여 개선하거나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우리말 용어들에 대한 고려를 심도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가 요즈음 우리가 어떤 일에 화를 내고, 나와 다른 부분이 있다 하여 편을 가르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내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정보와 생각이 전체를 보고 헤아리는데 부족함이 없었는지, 비판에 앞서 어떤 대안을 가져야 하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세계에 가장 다양한 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한글이 창제된 오늘, 스스로 돌아볼 일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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