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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천덕꾸러기 반말의 재발견. 우리 소통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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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천덕꾸러기 반말의 재발견. 우리 소통해볼까.

입력
2019.10.09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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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스타트업 ‘클래스101’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나이도 모른 채 반말로 대화한다. 회사 내 최연장자 천세희(왼쪽에서 세번째) 부대표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스무 살 차이 나는 동료와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쓰는 반말은 형식적인 존댓말보다도 때론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박형기 인턴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스타트업 ‘클래스101’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나이도 모른 채 반말로 대화한다. 회사 내 최연장자 천세희(왼쪽에서 세번째) 부대표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스무 살 차이 나는 동료와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쓰는 반말은 형식적인 존댓말보다도 때론 소통을 더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박형기 인턴기자

나이라는 틀 벗고 동등한 위치서

자유롭게 고민ㆍ아이디어 나눠

학생ㆍ교사 간 진정한 소통 경험

직장선 빠른 의사결정 효과도

“반말ㆍ존댓말이란 형식 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ㆍ태도 더 중요”

#.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14년 경력의 이승윤(39) 교사는 학년 초가 되면 학생들에게 특별한 제안을 한다. 자신과 반말로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해도 된다는 것. 단 학생이 먼저 반말을 하면 자신도 반말로 답하고, 존댓말 쓰면 자신도 존댓말을 쓰는 조건이다. 학생들의 당황하는 반응은 당연한 것. “아이들과 최대한 눈 높이를 같이해 소통하고 싶은데 학교라는 공간이 권위를 중시하고 위계 질서가 강하죠. 특히 교사는 반말하고, 학생은 존댓말 써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동등한 관계 설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처음엔 ‘승윤’ 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학생들이 차츰 반말 소통에 익숙해지고, 지금은 올해 이 교사로부터 수업을 듣는 학생 200여 명의 4명 중 1명은 “승윤. 그 문제는 다르게 풀어도 된다고 봐” “승윤. 조금 전 한 말은 학생들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반말로 대화하고 있다.

5년 전부터 학생들과 반말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이승윤(앞줄 가운데) 교사와 학생들이 운동회 때 졸업을 주제로 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다. 이승윤 교사 제공
5년 전부터 학생들과 반말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이승윤(앞줄 가운데) 교사와 학생들이 운동회 때 졸업을 주제로 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다. 이승윤 교사 제공

이 교사가 학생들과 반말 소통을 시작한 것은 5년 전. 학교 밖에서 청소년 인권 강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만난 어른, 청소년 등 다양한 연령대의 활동가들이 서로 반말을 썼다. 나이라는 틀을 벗고 동등한 위치에서 자유롭게 고민과 아이디어를 나눠 보기 위한 것이었다. 반말을 통해 소통이 잘 되는 걸 경험하면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시도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교사는 무엇보다 학생과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주고받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이렇게 말해도 되나’하고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죠. 물론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공격하는 표현은 쓰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죠. 반말로 소통하는 게 ‘야자타임’은 아니니까요.”

학교, 직장, 군대처럼 위, 아래 구분이 뚜렷한 곳에서는 반말과 존댓말 사용은 조직이 안정적으로 굴러 가기 위해서 구성원이 따라야 하는 규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나이, 경력, 지위 등을 따져 보고 한쪽은 상대를 높이고, 다른 한쪽은 상대를 낮춘다. 특히 이런 과정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반말을 쓰는 것은 조직 내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안될 짓이었다. 반말은 친구나 가족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 친밀함을 드러내는 표현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런 반말을 조직 내에서 공식 언어로 써보자는 시도는 파격이라고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26일 스타트업인 ‘클래스101’의 피플팀 아침 회의. 각자 업무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인데 이날은 신입 사원 채용 관련 얘기를 나눴다.

[저작권 한국일보] 스타트업 ‘클래스101’ 천세희(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대표와 직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스퀘어 빌딩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반말로 대화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스타트업 ‘클래스101’ 천세희(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대표와 직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스퀘어 빌딩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반말로 대화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장근우(29)= “지원자들을 살펴보면 우리 기업 문화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어.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우리를 좀 더 잘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 봤으면 좋겠어.”

김관영(36)= “사실 나도 많은 지원자들 면접을 봤지만 우리와 맞는 사람을 찾으려면 채용 공고를 좀 더 신경 써서 만들어야 할 것 같아. 동시에 우리 직원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을 직접 추천 받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

이혜정(28)= “좋아. 나는 오늘 판교에 가서 청년 고용 관련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해. 밥 먹고 가려는 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2018년부터 일반인들에게 취미 활동을 돕는 온라인 영상 강의와 관련 도구를 함께 제공하는 이 회사의 공식 소통 언어는 반말이다. 90명이 넘는 20~40대 직원들이 업무 관련 대화는 물론 회사 밖에서 나누는 사적 대화까지도 반말로 한다. 빠른 의사 결정을 위한 선택이다. 서로의 나이도 공개하지 않는다. 김민지(27) 매니저는 “적은 인원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모아 내고 계속 끌고 갈지 말지 빨리 결정하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새 멤버가 올 때마다 나이를 따지고 어떤 말을 쓸지 고민하느라 타이밍을 놓치거나 할 말을 다 못하는 상황을 줄여 보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속도와 효율성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경영 전략 차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말 소통을 통해 얻은 더 중요한 소득은 진정한 소통이다. 클래스101의 최연장자 천세희(44) 부대표는 4개월 전 새 멤버로 합류했다. “입사 전부터 반말 쓰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저보다 20살은 어려 보이는 동료가 와서 밥 먹었어라고 말을 걸었을 때 당황스러웠죠. 물론 겉으로 티는 내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먼저 어린 동료들에게 반말을 하라고 재촉하고 부추깁니다.”

그는 네이버, 배달의민족, 맥도날드코리아 등 그 동안 거쳐 온 다른 직장에서보다 훨씬 더 소통이 잘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많은 직장에서 수평 관계를 위해서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그건 윗사람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한 수평이기 때문에 소통의 한계가 크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내가 너희에게 존댓말 써줄게’라는 식이고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고 느끼고 윗사람과 말 섞고 싶어하지 않아하죠. 아랫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관심을 보일라치면 ‘어 저 임원이 내가 뭘 잘못했나 체크한다’면서 더 멀리 가버려 속상하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서로 별별 얘기를 다 해요.” 나이, 학번 같은 ‘호구 조사’ 대신 상대방의 취미, 습관 등을 궁금해 하고 사람 자체를 이해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장점도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반말로 의사소통하는 스타트업 ‘슈퍼브에이아이’ 직원들이 2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과 종로구 사무실로 나뉘어져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박상준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반말로 의사소통하는 스타트업 ‘슈퍼브에이아이’ 직원들이 2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과 종로구 사무실로 나뉘어져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박상준기자

인공지능 학습에 필요한 머신러닝 데이터 플랫폼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인 ‘슈퍼브에이아이(Superb AI)’도 직장 내 의사 소통을 반말로 진행하고 있다. 김진형(41ㆍ가명)씨는 20년 직장 생활 중 절반 정도를 IT기업에서 일했다. 이전 직장에서 직급을 없애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고 존댓말을 썼다. 하씨는 그러나 자신보다 나이 어린 대표(CEO)가 존댓말을 쓰면서도 태도 자체는 매우 권위적이라 수평 관계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도리어 이곳에 와서 나이 어린 동료들과 서로 반말을 쓰면서 가식 없이 대화 하는 것이 소통 면에서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길호현 서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반말은 버릇 없고, 존댓말은 예의 바르다는 고정 관념으로는 갈수록 복잡해 지는 인간 관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며 “반말이냐 존댓말이냐는 말의 형식보다는 말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소통을 바라는지 그 인식과 태도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말을 천덕꾸러기 취급할 게 아니라 반말도 얼마든지 언어 생활과 의사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한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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