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근현대사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저에겐 영화를 만드는 힘이 됐습니다.” 카메라와 한 몸이나 다름없던 62년 인생을 돌아보는 ‘영화 대가’의 목소리는 여전히 꼿꼿하고 활기가 넘쳤다. 올해 90세 고령임에도 영화를 꿈꾸는 그에겐 ‘원로’보다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부산을 찾았다.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촬영감독의 회고전이 열린 건 아시아 최초다. 4일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문화홀에서 마주한 정 감독은 “젊은 시절 알프레드 히치콕과 존 포드 같은 감독들을 보면서 나도 저 나이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며 “이번 회고전이 무척 영광스럽고 앞으로 더 많은 촬영감독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 감독은 탁월한 영상 미학으로 한국 영화의 격조를 높였다고 평가받는다. 1957년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부터 2007년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까지 50년간 현장을 지키며 영화 138편에 참여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와 ‘충녀’(1972) ‘이어도’(1977),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 등 한국 영화사에 손꼽히는 명작들이 그의 카메라로 빚어졌다. 특히 임권택 감독은 최고의 동반자였다. ‘만다라’(1981)와 ‘서편제’(1993)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 30년간 20여편을 합작했다. 정 감독은 “오늘날까지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의 3분의 1은 그동안 함께 작업한 감독 38명의 힘이고, 또 다른 3분의 1은 영화에 미쳐서 1년에 6개월 이상 집을 떠나 있는 나 대신 홀로 가정을 지킨 아내의 공이며, 나머지 3분의 1만이 나의 노력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한국 사회 격변기를 관통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후 좌우 대립과 한국전쟁, 남북 분단, 4ㆍ19 혁명, 군사 독재, 5ㆍ18 민주화운동 등을 온몸으로 겪으며 영화로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지 항상 고민했다”며 “그렇게 긴장 속에 살았기에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어두운 시대에는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제목조차 마음대로 짓지 못했죠. 참을 수 없이 분노했고, 그 분노는 영화를 통해 표출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화녀’는 강렬한 색채로, ‘만다라’는 짙은 어둠으로, 시대의 어둠에 저항했습니다. 제가 찍은 영화를 두고 아름답다고들 하는데 저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담아 낼 것인가만 고민했고 평생의 숙제로 여겼습니다.”
정 감독은 3일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오랜만에 임 감독과 재회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따뜻하게 안으며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정 감독은 “1980년 직장암으로 투병할 때 임 감독이 찾아와 ‘만다라’를 제안했고 그 영화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며 “임 감독이 6세 아래지만 동시대 사회와 역사,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거의 일치해 무척 편하게 작업했다”고 회고했다.
‘임권택ㆍ정일성 콤비’의 충무로 귀환을 기다리는 영화 팬도 여전히 많다. “매너리즘에 빠져 서로에게 독이 될 때 헤어졌지만,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는 모르죠. 하지만 임 감독도 젊은 촬영감독과 작업해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느닷없이 찾아와 제안해 준다면 반가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삶에 만족하지만, 거친 들판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품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 감독은 후배 영화인을 위한 따뜻한 격려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재능 많은 후배 감독, 촬영감독이 정말 많습니다.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아주 고무적이에요. 다만 자본의 쏠림은 걱정스럽습니다. 대기업 자본이 흥행이 될 만한 영화에만 물량을 쏟으면서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가 죽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가 계속 분투해 주길 바랍니다. 한국 영화의 밝은 미래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부산=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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