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꿈 꾼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해줬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수원과의 FA컵 준결승 2차전이 끝난 뒤 김학철 화성 감독이 밝힌 소감이다. 그의 말투에서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도 물씬 묻어 나왔다.
“K3리그가 평소에 소외됐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수들이 많이 준비하는데 사실 언론의 관심도, 기사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4강에 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것만으로도 선수들이 희망을 갖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선수들이 꿈을 잃지 않고 도전을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라커룸으로 돌아가서 정말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보통 나오지 않는 박수가 김 감독에게 쏟아졌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난 7개월간 화성의 여정은 한국판 ‘칼레의 기적’이라고 불린다. ‘칼레의 기적’은 지난 1999-2000 시즌 프랑스 FA컵에서 4부리그 팀이었던 칼레가 이룩한 준우승 신화를 뜻한다. 당시 아마추어팀 칼레는 수십억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로 구성된 리그앙(1부)의 스트라스부르, 보르도를 연파하며 대회 82년 역사상 최초로 4부리그 팀이 결승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결승전에선 낭트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모든 프랑스 국민들을 팬으로 만들며 ‘칼레 신드롬’을 일으켰었다.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오늘은 승자가 두 팀이다. 낭트가 결승전의 승리자라면, 칼레는 정신력의 승리자”라며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화성도 마찬가지였다. 1년 운영비가 수십 배 차이 나는 1부리그 팀을 연달아 격파하며 K3리그 팀 최초의 8강, 4강 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연이어 써왔다. 4강 1차전에선 수원을 1-0으로 잡아 “설마”를 외치게 했지만, 이날 2차전에서는 연장전 끝에 세 골을 내주고 패하며 짧지만 길었던 도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굵은 빗방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화성 선수들에게 수원 팬들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K리그 득점왕 출신 유병수(31), 수원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아마추어팀에 적을 두게 된 문준호(26), 매 시즌 프로 복귀를 꿈꾸는 전보훈(31), 부상으로 성남에서 방출된 골키퍼 이시환(21)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날 경기는 화성 선수들뿐 아니라 수원까지 원정을 온 팬들의 마음 속에도 희망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화성의 홈 화성종합운동장 바로 앞에 있는 향남고에 재학 중인 조명환, 송재우, 박준경(18)군이 대표적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이들은 수능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경기장을 찾았다. 평소 홈 경기를 빼놓지 않고 찾는 ‘진성’ 화성팬인 이들은 처음엔 국가대표 출신 심우연(34)을 보고 지역팀 화성의 팬이 됐다가 화성 축구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경기 전 “수원 팬들 많아도 하나도 안 무섭다”던 이들은 패배에도 “이게 끝이 아니니까”라며 환하게 웃었다.
미래의 축구선수인 어린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성 U-12팀에서 프로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는 박시후, 박준형, 임현민, 장시웅, 여민성, 박성원(12) 6명의 동갑내기 친구들은 부모님과 함께 수원을 찾았다. 이들은 다니는 학교는 다르지만, 화성 유소년팀에서 함께 우정을 나눠왔다. “골 많이 넣는 화성 선수들이 멋있어서 좋다”는 6명은 커서 스피드가 빠른 문준호, 킥이 좋은 이시환 골키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 이들은 곧 화성 U-15팀부터 타지의 중등부 팀까지 각지로 흩어지게 되지만, 화성의 축구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좋아하는 선수를 따라 화성을 응원하게 된 K리그 팬들도 있었다. 동료 이길재(30)씨와 함께 온 송덕용(52)씨는 원래 집(서초구)에서 가까운 서울이랜드를 응원했었는데, 중원을 든든하게 지켜준 김준태(34)가 화성으로 이적하자 우연히 화성 경기를 관람했는데 한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다. 송씨는 “화성 축구를 ‘행복 축구’라고 한다. 정말 잘한다”면서 “지지부진한 K리그2보다 K3리그가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화성 팬 대부분은 단순히 FA컵 4강 진출이 화제가 돼 경기장을 찾은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화성 축구를 아끼는 팬들이었다. 이들은 팬이 된 이유로 “재미있는 공격 축구를 하기 때문”이라고 입 모아 말했다. 실제로 화성은 K3리그 어드밴스드에서 14승2무3패의 압도적인 전적으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심씨는 “언젠가 K리그1에서 뛰는 화성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 내년 내셔널리그를 통합한 새로운 K3, K4리그가 도입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현재 한국 축구에선 1, 2부만 승강제가 적용되지만, 축구협회는 이른 시일 내에 2, 3부리그뿐 아니라 1~7부까지 승강제가 적용되는 체계적인 디비전시스템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 언젠가 1부리그에서 뛰고자 하는 아마추어팀 화성의 꿈이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의 문은 열려 있다. ‘화성의 기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수원=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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