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학대·방임 등 없었지만 최근 “초등생 때 첫 성관계” 진술 
 가족·이웃에 철저히 본성 숨기며 살인 반복 속 성도착증 심화 추정 
[저작권 한국일보] 이춘재 일생 및 범행일지 - 송정근 기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이춘재(56)에 대한 주변인들의 기억은 한결 같았다. 고등학교 동기들이나 친인척 모두 “조용한 아이였고 큰 말썽 한번 부린 적 없다”고 했다. “착한 아들이었다”는 그의 어머니(75) 말처럼 이씨는 조용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사춘기를 겪었을 학창시절에도 튀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1994년 1월 처제 성폭행 살인으로 24년째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의 동료 죄수들도 “남한테 폐 한번 안 끼칠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이씨가 처제를 포함해 총 15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폭행을 저지른 희대의 연쇄살인마로 드러나 전 국민을 경악시켰다. 허술한 수사망을 비웃듯 여성 수십 명을 범죄의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자기 입으로 털어놨다. ‘살인마’라는 비난을 받았던 역대 흉악범들과도 이씨는 달랐다. 범행 대상은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노인과 젊은 여성들. 가족과 이웃 앞에선 온순했지만 약자에겐 잔혹했던 이씨의 두 얼굴이다.

 ◇철저히 숨긴 본성, 이웃들은 아직도 “그런 사람 아냐” 
이 씨의 고등학교 재학시절 모습. 연합뉴스

이씨의 고향이자 결혼 전까지 살았던 경기 화성시 진안동, 경기 수원시의 고등학교 친구들 말을 종합하면 이씨는 일상생활 속에서 속내를 철저히 감추고 주변을 속였다. 83년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들은 이씨 얘기를 꺼내자 “진짜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이씨와 같은 반이었다는 A(56)씨는 “워낙 조용해서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친구였고 운동이나 서클 활동에도 참여한 적 없는 걸로 안다”며 “그래서 최근 보도가 나왔을 때 처음에는 동명이인이 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자백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서 머리가 쭈뼛쭈뼛 설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이씨와 고등학교 3학년 동창인 B(56)씨는 “목소리가 중성적이고 얼굴이 하얗고 뽀얘서 기억에 남는다”면서도 “야한 잡지를 누가 학교에 들고 와도 앞에 나서서 ‘보자!’고 주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성격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흡연 등으로 말썽을 부리거나 다른 친구와 싸워서 걸린 적도 없었다”며 “그 당시에는 ‘왕따’가 없었지만 이씨는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3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이춘재의 고교졸업 사진(오른쪽). 몽타주와 전체적인 이미지는 물론 쌍꺼풀이 없고 넓은 이마, 눈매 등이 매우 흡사하다. 독자 제공

화성연쇄살인이 시작된 86년 연쇄 성폭행이 발생했고, 화성 2차(86년 10월 20일)와 6차(87년 5월 2일) 살인 모두 진안동 부근서 일어났지만 이씨는 이웃들에게 전혀 의심의 눈총을 받지 않았다. 진안동 주민이나 이씨 친척들은 여전히 “놀랍다. 이씨를 범인으로 의심해본 적이 없다”는 반응뿐이다. 진안동에서 식당을 운영했다는 이씨의 친척 이모씨는 “처제 살인 사건으로 수감되기 전까지 부모님에게 잘했다”며 “이후 이씨 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얌전하던 애가 어떻게 그런 사건을 저질렀나 싶어 그런 게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가정 환경도 특별 나지 않았다. 진안동의 노인정에서 만난 한 80세 노인도 “같은 동네에서 살아 이씨 엄마를 잘 안다”며 “이씨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참 좋은 사람이고, 다른 가족들도 아주 착한 사람들인데 이씨가 소문으로만 듣던 사건의 용의자라니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씨의 어머니 김모(75)씨는 “내가 남편과 싸우기라도 하면 ‘빨리 푸는 게 제일 좋은 약’이라며 위로할 정도로 착했던 아들”이라며 89년 강도예비로 재판을 받게 됐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걔가 그런 애가 아니라고 탄원서를 넣기도 했다”고 밝혔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확정 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씨는 교도소에서도 별 말썽 없이 지내 1급 모범수로 분류됐다. 물론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20년 넘는 수감 기간 동안 외부로 외출하지는 않았으나, 교도소 접견이 가능해진 2006년부터는 가족과 지인 등이 이씨를 접견해왔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56)가 1989년 9월 경기 수원시의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한 사건에 대한 수원지방법원 1심 판결문.
 ◇성도착증, 어린 시절 성 경험이 영향 줬나 

주변인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 이씨는 잔혹한 살인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연루된 범죄들을 꿰뚫는 키워드는 ‘성도착증’이다. 성도착증을 가진 이들이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는 방식은 다양하나 이씨는 상대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살인으로 이어졌든 이어지지 않았든, 이씨가 자백한 범행 모두는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성폭행 미수에 그쳤던 사건이다.

9차례의 화성연쇄살인 모두 현장에서 정액이 발견되거나 옷이 벗겨져 있는 등 성폭행이 동반된 사건이었으며, 저항하는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두르거나 성기를 훼손한 경우도 많았다.

전문가들은 이씨의 성도착증이 범행을 거치며 점차 심화됐을 것이라고 봤다. 이씨가 처음부터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니라 성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살인이 주는 ‘자극’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씨의 성도착증도 처음에는 관음증 수준이었을 것”이라며 “(도착증이) 진화되고 학습되니까 성폭행도 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붙잡히지 않으니까 계속 범행을 저지르고 여기에 중독되는 수준에 빠졌을 것”이라는 진단도 내놓았다. 실제로 이씨가 군대에서 제대한 86년 1월 이후부터 첫 번째 살인이 발생한 86년 9월 15일까지 최소 8건의 연쇄 성폭행 사건이 화성 일대에서 벌어졌다. 당시 피해자들이 증언한 범인 인상 착의가 이씨와 유사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속옷을 이용한 재갈이나, 결박 방식 등도 화성 사건과 유사했다.

사건을 재조사하는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도 이씨의 성도착증 형성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씨를 접견 조사하고 있는 경찰은 최근 이씨로부터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본부 자문을 제공하고 있는 경찰 출신 프로파일러 권일용 전 경정은 “반드시 관련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성장기나 어린 시기 성 경험이 비정상적인 성 개념이 형성되는 데 상당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기존 범죄자들에게서 많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1994년 처제를 성폭행 후 살해한 이씨가 청주서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중부매일제공
 ◇허술한 수사망, 믿어준 가족…”범죄 학습했을 것” 

이씨 가족과 이웃들은 양육 과정에서 학대나 방임 등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아직 이씨의 군대시절 정보는 경찰이 조사 중이다. 일각에서는 군 복무 중 가혹행위 등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전문가들도 이씨가 타고난 기질만 가지고 연쇄살인범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분명한 건 갑자기 살인마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라며 “태생적 이유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이씨가 겪은 경험 모두가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씨가 잘못된 행동을 보였을 때 지금처럼 주변에서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면 이씨의 이상 행동도 심화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연쇄살인에 이르기 전까지 작은 범죄들을 저지르며 범죄를 ‘학습’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주요연쇄살인범들의 범죄 비교 - 송정근 기자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씨 모친이 처제 살인 역시 며느리에게 원인이 있다고 돌리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런 환경 속에서 이씨가 어떻게 자랐느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씨의 양육 환경을 더 분석해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오 교수는 “이씨의 범행을 보면 모두 기저에는 성적인 동기가 깔려있다”며 “추측이지만 청소년기에 잘못된 성적 환상을 키우는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씨를 세 차례나 수사하고도 놓친 허술한 수사망도 이씨가 연쇄살인마로 거듭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조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심리학의 행동수정원리로 설명이 되는데, 어떤 행동을 한 뒤에 본인에게 긍정적 결과를 얻게 되면 행동을 다시 할 확률이 높아진다”며 “수사망에서 벗어난 뒤에는 ‘내가 성공했다’는 식으로 평가하고 그 수법을 다시 사용했을 것”이라고 봤다. 조 교수는 이어 “이씨가 경찰 조사를 받으며 수사 정보를 알고 난 후에는 경찰 수사망을 피해 더 큰 희열을 느끼며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87년 7월과 88년 말, 90년 초 세 차례 당시 수사본부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풀려났다. 증거 부족이 이유였다. 9차(90년 11월 15일) 사건 이후 용의자 혈액형이 B형으로 특정되자, 혈액형이 O형인 이씨는 수사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씨의 범행은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하고 나서야 끝났지만 당시 화성 수사본부와 청주 경찰 간 공조 부실로 화성 사건의 진실은 25년간 수면 아래 잠들어 있었다.

지난달 18일 첫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했던 이씨는 경찰이 현장 증거물에서 자신의 DNA를 검출했다고 밝히자 입을 열었다. 이씨가 자백한 살인 14건에는 다른 범인이 잡혀 처벌까지 받은 8차(88년 9월 16일) 사건도 포함됐다. 경찰은 이씨 자백의 진위를 따지면서 화성 사건 전후로 발생한 미제 사건까지 들여다볼 방침이지만 이미 모든 범행의 공소시효는 만료됐다.

화성=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화성=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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