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8, 27, 25, 27. 이번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의 낮 최고 기온이다. 9월도 아니고 이제 10월인데 28도를 찍을 만큼 덥고 습한데다가 태풍도 찾아왔다. 제법 서늘했던 지지난 주쯤 여름 옷을 얼추 정리하고 셔츠며 재킷이며 가을 옷을 꺼내 놓았지만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세먼지에 휩싸여 몇 십일 지내다 보면 강추위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짧게 지나가더라도 어쨌든 찾아오기는 할 가을을 위해 계절의 맛을 제대로 내주는 식재료를 살펴보자. 바로 단호박이다. 애호박 등이 여름 호박으로 분류된다면 추운 계절을 버틸 수 있는 단호박류는 겨울 호박에 속한다.
◇단단한 껍질 속 부드러운 속살, 카보차
단호박도 종류가 다양하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즐기는 월말의 할로윈(만성절)에 깎아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만드는데 쓰이는 오렌지색의 ‘오리지널’ 단호박은 펌킨(pumpkin)이다. 죽도 끓여 먹을 수 있지만 김치를 담그면 별미이다. 경기가 고향이고 충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겨울이면 무를 섞어 액젓을 넉넉하게 써 푹 익힌 호박지가 최고의 반찬이었다. 한편 요즘 우리가 단호박이라 주로 먹는 종류는 ‘카보차 스쿼시(Kabocha Squash)’인데, 그렇다면 ‘펌킨’과 ‘스쿼시’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펌킨’이 ‘스쿼시’의 일종으로 이들 모두가 ‘쿠커비타(cucurbita)’속의 일원이다.
한편 우리에게 단호박이라 두루 통하는 것은 카보차이다. 오렌지색 펌킨에 비하면 살이 수분이 적고 살이 조금 더 단단하며 단맛도 두드러지는데 손질이 조금 까다롭다. 무엇보다 채소이지만 껍질(rind)보다 껍데기(shell)에 더 가까운 단단한 표면 탓이다. 따라서 통호박인 상태에서는 껍질을 벗겨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뚫고 속살까지 들어가기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둥글넓적한 호박의 모양, 음식점 주방만큼 언제나 잘 벼려 놓지 않는 가정 식칼의 상태까지 감안하면 칼을 잘못 다뤘다가 미끄러져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반을 갈라 놓으면 이후의 과정은 수월한데, 심지어 유튜브를 뒤져 보아도 가르는 요령은 보여주지도 않거나 칼만으로 아슬아슬하게 썰어낸다. 누구에게도 권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다.
그렇다면 어떤 요령을 따라야 할까? 유료 요리 강습 비디오나 요리책을 찾아 보면 카보차 공략법을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첫째, 일단 꼭지를 숟가락이나 칼로 떼어낸다. 둘째,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 도마를 위에 깔아준 다음 호박을 올린다. 식칼이나 빵 반죽칼을 꼭지 근처에 대고 고기망치로 천천히 두들겨 꽂는다. 셋째, 식칼이든 빵 반죽칼이든 껍질과 속살을 완전히 관통한 것을 확인한 뒤 고기망치로 칼날을 살살 두들겨 가며 수직 방향으로 호박을 가른다. 한쪽을 완전히 가르면 수직으로 세운 뒤 칼날을 세워 반대편을 마저 갈라준다. 단단한 껍질을 공략했더라도 전분 탓에 살이 달라붙어 칼날이 마음 먹은 만큼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으므로 조심, 또 조심하며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
안전에 초점을 맞춘 공략법은 이렇지만 대부분의 가정은 고기망치나 빵 반죽칼을 갖추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단 행주라도 깐 뒤 꼭지 근처를 손잡이와 가장 가까운 부분의 칼날로 조심스레 두어 차례 찍어 충분히 틈을 낸 다음 칼 끝을 꽂아 천천히 움직여 가른다. 일단 반을 가르고 나면 이후의 손질은 한결 순조롭다. 일단 숟가락으로 씨와 섬유질을 깔끔하게 긁어낸 다음 썰어낸 면이 도마에 닿도록 엎어 위와 아래를 평평하게 썰어준다. 그대로 한 번 더 반을 가르면 비로소 손으로 쥐기 쉬워지니 껍질도 안정적으로 벗겨낼 수 있는데, 식칼이나 과도보다 채소 필러(vetetable peeler)가 훨씬 안전하고 편하니 참고하자.
조리 방식에 따라 껍질을 아예 벗겨내지 않을 수도 있다. 오븐에 구우면 되는데, 센불에 좀 구워야만 살이 부드러워지니 다소 번거롭지만, 대신 캐러멜화를 거쳐 훨씬 진하고 강렬한 호박맛을 볼 수 있다. 오븐을 205℃로 예열하고 크기에 따라 이등분 혹은 사등분한 단호박에 식용유와 소금 약간을 더해 버무린 뒤 자른 면이 닿도록 제과제빵 팬에 올린다. 20분 가량 구운 뒤 뒤집어 15분 가량, 속살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익힌다. 이렇게 익힌 단호박은 사실 껍질까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해지는데 살에 비하면 딱딱하므로 딱히 권하지는 않는다. 손으로 껍질을 벗겨내거나 아니면 숟가락으로 살을 살살 긁어내면 준비는 끝이다.
만약 바로 쓰지 않는다면 대략 손바닥 크기만한 지퍼백에 적절히 담아 눌러 편 다음 조리일자를 기록해 냉동실에 보관한다. 6개월은 두고 쓸 수 있으니 번거로운 손질 및 조리 과정을 감안한다면 한 번에 많이 준비해 두고 쓰는 편이 낫다. 오븐이 없다면 쪄서 익힐 수 있는데 표면적이 작을 수록 빨리 익으므로, 사등분해 껍질까지 벗긴 단호박을 각각 한 번 더 사등분해 깍두기의 무우나 멜론처럼 썬다. 찜기에 옹기종기 담고 소금을 살짝 뿌려 젓가락이나 포크가 전혀 저항 없이 들어갈 때까지 푹 익힌다. 오븐에 구운 것과 같은 요령으로 보관한다.
◇단호박 맛 돋우는 다섯 가지 요령
여기까지 이뤘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흔한 단호박 음식은 쉽게 만들 수 있다. 호박죽이라면 찹쌀가루에 살짝 되직하게 물을 더하고 소금으로 간해 풀을 끓인 뒤 굽거나 찐 호박살을 더해 뭉근하게 끓인다. 찹쌀풀을 닭육수로 바꾸면 죽 대신 수프를 끓일 수 있다. 다만 풀이든 육수든 호박만 더해 끓이면 어딘가 모르게 심심할지도 모른다. 단호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법 달더라도 여운이 짧고, 한편 풋내도 거슬릴 수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단호박의 맛을 돋워줄 수 있는 요령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향신료이다. 겨울 호박이므로 따뜻한 계열의 향신료인 생강, 계피, 너트멕, 정향, 후추 등과 제법 잘 어울려 좀 더 섬세해진다. 두 번째는 유제품이다. 우유나 생크림을 비롯해 버터, 크림치즈 등은 호박에 풍성함을 덧입힌다. 굽거나 찐 단호박에 바닐라 아이스크림만 얹어도 제법 그럴싸한 디저트가 되니 참고하자. 세 번째는 단맛인데, 중립적인 백설탕보다 나름의 색과 향을 지닌 감미료가 향신료를 더하는 원리와 흡사하게 단호박과 더 잘 어울린다. 당밀의 향과 색을 품고 있는 흑설탕이 더 나은 선택이고, 그보다 메이플 시럽이나 꿀이 좋고, 초콜릿도 있다. 네 번째로는 호두, 아몬드, 헤이즐넛, 피칸, 귀리 등으로 고소함 및 포만감을 보태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네 가지를 적절히 써서 만든 죽이나 수프가 텁텁하다면 요거트나 사워크림을 얹어 풍성함을 더 보태는 한편 신맛으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안 살펴보면 섭섭할 단호박 음식의 대표, 파이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냥 사먹자. 가을이면 한 번쯤은 구워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아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통조림 퓌레와 기성품 파이 반죽을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서양이라면 모를까, 둘 다 품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하루 종일 걸리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굽거나 삶아 익힌 단호박을 냄비에 담아 약한 불에 올려 계속 저어가며 30분 정도 물기를 날려주고(이때 ‘달수’ 같은 단맛 강한 고구마를 20%쯤 섞으면 파이가 한결 더 맛있어진다) 계란, 크림, 우유, 흑설탕, 계피, 생강 등을 더해 파이 소를 만든다. 여기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반죽 또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품이 든다. 잘게 썬 버터를 냉동실에 얼렸다가 밀가루에 더해 잘게 갈아준 뒤 물을 붓고 뭉쳐 밀어 파이 접시에 얹어 오븐에 초벌 굽기를 한 뒤….
역시 사먹는 게 최고다. 단호박 파이에는 미성년자라면 부드럽게 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덩이가, 성인이라면 도수도 단맛도 강한 마데이라, 포트, 셰리 같은 디저트 와인이 가장 잘 어울린다.
◇고소한 땅콩호박과 면발 닮은 국수호박
카보차와 오렌지색 펌킨이 가장 흔하지만 요즘은 마트에서 땅콩호박도 살 수 있다. 속살이 땅콩처럼 고소해서 이름 붙은 모양인데, 서양에서는 버터넛 스쿼시(Butternut Squash)라 부르니 적절한 번역이다. 껍질은 미색, 혹은 탁한 연노란색을 띄고 있는데 카보차와 달리 얇고 부드러운 편이라 채소 껍질 벗기는 칼(Peeler)로 어렵지 않게 벗길 수 있다. 길쭉한 가운데 끝부분만 전구처럼 둥근데 그 속에만 씨가 들어차 있다. 따라서 카보차와 비교하면 손질도 편하고 살의 비율도 높으니 본격적인 단호박 사냥(?) 전에 연습용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단호박과 호환이 가능하지만 맛이 옅은 편이니 수분을 미리 걷어내는 게 좋다. 깍둑 썰어 전자레인지에 15분 정도 돌린 뒤 굽거나 볶아 쓴다.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더위의 끝자락에 묻어 가고 싶다면 국수호박을 권한다. 땅콩맛이 난다면 국수호박은 국수와 닮았다. 속살이 가늘게 가닥가닥 갈라지는 형국이 영락없는 국수인지라 서양에서도 스파게티 스쿼시라 일컫는다. 그래서 국수의 대안으로 많이 홍보되지만 소금에 절이지 않고 무쳐 먹을 수 있는 애호박의 대용, 즉 나물거리라 생각하는 편이 밥상에 올릴 기회를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손질 요령은 여태껏 살펴 보았던 단호박과 같다. 오븐이 있다면 구워서 맛을 한 켜 덧댈 수 있고, 아니라면 찜통에 15~20분 가량 쪄서 포크로 속살을 살살 긁어낸다. 애호박 볶음(나물)처럼 새우나 멸치젓의 짭짤한 감칠맛에 식초의 신맛을 더해 버무리면 입맛을 돋우는 밥 반찬이 되고, 다른 나물 사이에 살짝 끼워 주면 비빔밥에도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밀가루 국수의 대용으로 쓰기엔 수분 일색이니 포만감의 차원에서 무리가 있지만 양식의 길을 찾고 싶다면 파스타처럼 토마토가 제 짝이다. 생토마토라면 깍둑 썰어 30분 가량 소금에 절여 배어 나온 즙과 함께 버무리고, 아니면 토마토 소스를 마치 비빔면의 양념장처럼 끼얹어 살포시 비벼준다. 어떤 경우라도 소금간을 충분히 하고 올리브기름을 푸짐하게 끼얹어 먹는다. 토마토 소스라면 대체로 통조림 제품을 떠올릴 텐데, 유리병에 담긴 ‘퓨레(puree)’ 혹은 ‘파사타(passata)’도 있다. 뚜껑을 따서 바로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냉장보관이 가능하니 통조림보다 당장에 다 써야 한다는 부담도 적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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