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미국 워싱턴 정가의 ‘아웃사이더’였다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참 기이한 대통령이다. 이유야 숱하게 많지만, 대표적인 건 역시 너무나 거침없는 언행이다. 심지어 타국 정상에게 사실상 수사나 다름없는 자국 정치인 뒷조사까지 요청하다니. 지난주 미 하원의 대통령 탄핵 조사 결정을 낳은 ‘우크라이나 스캔들’ 얘기다.
문제의 대화는 7월 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였다. 대부분은 총선 승리를 거둔 젤렌스키에게 건넨 덕담과 양국 간 협력 다짐이었으나, 트럼프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바이든의 아들에 관한 많은 얘기가 있다.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검찰의) 기소를 막았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파악하고 싶어한다. (미국의) 법무장관과 함께 당신이 뭐든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 관련 의혹을 우크라이나 검찰이 파헤쳐 달라는 뜻이다. 젤렌스키의 답변도 걸작이다. “차기 검찰총장은 100% 내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부패에 대한 얘기를 했을 뿐, 아무것도 아닌 통화”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후 사정’을 따지면 그리 간단치 않다. 내년 대선 레이스는 이미 시작됐고, 바이든은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다. 게다가 통화 며칠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4억달러 군사 원조 동결’ 지시를 내렸던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겐 ‘미국의 도움’을 유독 강조했다. 명시적 언급은 없었어도, ‘거액 지원을 미끼로 우크라이나를 동원, 잠재적 경쟁자의 약점을 캐려 했다’는 추론은 꽤 합리적이다.
이렇듯 말이나 행위를 해석의 대상인 텍스트(text)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컨텍스트(context, 맥락) 속에서만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컨텍스트와 분리해 텍스트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 달 반이 넘도록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조국 사태’도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 거센 반대 여론에 직면한 검찰 수사의 진짜 의미는 주요 변곡점이 된 순간들의 컨텍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다.
먼저 지난 8월 27일 검찰의 첫 압수수색 무렵을 보자. 이날은 조국 법무장관(당시는 후보자)이 검찰 개혁안 등 정책 과제를 발표한 이튿날이었다. 그에 앞서 열흘간 웅동학원 의혹, 딸 장학금ㆍ논문 의혹이 줄을 이었던 가운데, 이런 행보는 ‘사퇴 의사는 없다’는 신호로 비쳤다. 같은 날 여야의 인사청문회 개최 합의도 나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갑자기 특수부가 대규모 압수수색에 나선 것이다. 검찰이 상당 기간에 걸쳐 은밀하게 ‘내사’를 벌여 왔다는 메시지였다.
지난달 3일엔 조 장관 부인인 정경심 교수의 연구실도 압수수색을 당했다. 바로 전날, 조 장관은 ‘국회 기자간담회’라는 형식을 빌어 각종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또, 정 교수가 사문서위조 혐의로 기소된 지난달 6일 밤은 국회 인사청문회가 종료되던 때였다. ‘부인 형사처벌’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조 장관은 사흘 후 결국 임명됐다. 그리고 지난달 23일, 조 장관은 사상 처음으로 ‘현직 법무장관 자택 압수수색’이라는 굴욕의 주인공이 됐다.
여기서 읽히는 건 검찰이 수사권을 이용해서 청와대에 ‘조국 지명을 철회하라’, 조 장관에겐 ‘스스로 물러나라’는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보내 왔다는 점이다. 이는 공직후보자 검증 시 검찰이 해 왔던 종전 역할(청와대에 대상자 관련 내사ㆍ수사 여부 보고)을 한참 넘어선다. 임명 여부를 결정하는 인사권자를 상대로 검찰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한 셈이다. 명백한 월권이자 정치적 행위다.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던 윤석열 총장을 ‘100% 내 사람’으로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윤 총장은 이번 수사로 실제 그렇다는 걸 입증했다. 그러나 최악의 방식으로 보여 주었다. 어쩌면 정권의 코드를 충실히 따랐던 과거의 검찰보다도, ‘정치의 주체’가 되려 하는 윤석열호(號) 검찰이 훨씬 더 위험한 ‘정치 검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정우 국제부 차장 woo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