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영국 웨일즈 '헤이온와이'는 마을 광장서 반경 200m 남짓 안에 1,500명이 사는 작고 오래된 마을이다. 그 마을이 세계 책 마을의 원조이고, 헌책들의 성지다. 저마다 다른, 개성 있는 헌책방이 많을 땐 38곳이나 영업을 했다. 그걸로 유명해지면서 마을은 세계적인 문학축제와 철학-음악축제의 무대, ‘영혼의 우드스탁’이 됐다. 마을의 저 찬란한 변신은 1960년대 초, 대학을 갓 나온 23세 청년 리처드 부스의 엉뚱하고 유쾌한 모험에서 시작됐다. 2014년의 부스. richardkingofhay

헤이온와이(Hay-on-Wye

)는 영국 남서부 잉글랜드 경계에 있는 웨일즈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뒤로 블랙마운틴 산군의 브레컨비콘스(Brecon Beacons) 국립공원을 담장처럼 둘렀고 북서쪽으로는 와이(Wye)강이 흐른다. 강과 산 사이, 시계탑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200m가 채 안 되는 터에 13세기 노르만시대의 성 ‘헤이 캐슬(Hay Castle)’이 있고 손바닥만한 농지와 초지가 있고 경사진 도로 따라 주민 1,500명 남짓의 집과 가게들이 있는, 중세 장원공동체의 작은 세트장 같은 마을이다.

저 작고 후미진 마을이 세계 책 마을의 원조이고 헌책들의 메카다. 1960년대 이래 마을의 옛 극장과 소방서와 빈 가게들이 하나 둘 헌책방이 됐다. 마을의 희한한 변신에 언론들이 주목했고, 구경꾼들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헌책방은 더 늘어, 2000년대 중반 무렵엔 38곳이나 됐다. 서가에서 길을 잃을 만큼 넓은 헌책방도 있고, 시집 전문, 추리소설 전문, 어린이 책 전문 헌책방도 생겨났다.

세계적 문학축제 ‘헤이 페스티벌’이 80년대 말부터 그 마을에서 열린다. 매년 5월 말 열흘간 열리는 축제에는 그 해의 가장 뜨거운 작가들이 초대된다. 올해 축제 마지막 날에는 아룬다티 로이가 낭독회를 열었고, 하루 전날엔 ‘LA 컨피덴셜’의 콧대 높은 미국 작가 제임스 엘로이가 공개 북토크를 했다. 동네가 하도 좁아 카페도 술집도 식당도 몇 없다. 그 덕에 옆 테이블에서, 산책길이나 어느 헌책방 서가에서 유명 작가를 만나 서명을 청해볼 수도 있다. 2001년 퇴임 직후 헤이 페스티벌에 다녀온 빌 클린턴은 그 축제를 “영혼의 우드스탁”이라 불렀다.

2010년부터는 ‘HowTheLightGetsIn Festival’이란 이름의 철학ㆍ음악 축제까지, 헤이 페스티벌 기간에 맞춰 와이 강변에서(2018년부터는 런던서도) 함께 열린다. 노엄 촘스키, 스티븐 핑커, 슬로보예 지젝 등등이 그 연단에 섰고, 그만한 수준의 뮤지션과 스탠딩 코미디언들이 공연을 펼쳐왔다. 두 축제의 컨셉트가 곧장 헌책과 이어지지는 않지만, 헤이온와이(줄여서 ‘헤이’)의 중세적 토포스(topos)와 헌책의 파토스(pathos)가 저 축제들을 가능케 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헤이를 본 삼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 여러 나라에, 호주와 말레이시아에, 한국의 파주 헤이리에 책 마을이, 50여 곳이나 생겨났다. 마을들의 연합회의인 ‘국제책마을기구(IOBT)’란 조직도 1998년 출범했다. 헌책 마을들은 2년마다 돌아가며 국제 헌책 축제도 연다. 헤이는 그 파장의 물리적 상징적 중심이다.

그리고, 그 중심의 중심에, 저 모든 책과 축제와 사람들의 이야기의 중심에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 1938.9.12~2019.8.20)라는 한 몽상가가 있다. 1961년 대학을 갓 졸업한 23세의 그가 외삼촌이 물려준 유산으로 헤이의 빈 소방서를 사들여 첫 헌책방 ‘‘The Old Fire Station’s Book Store’를 열었다. 헤이의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됐다.

리처드 부스는 웨일즈 남부 항구도시 플리머스(Plymouth)에서 태어나 헤이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유명한 바디용품 브랜드 ‘야들리 런던(Yardley London)’의 상속자이고, 군 장교였다는 아버지 집안 역시 예사롭지 않아, 부스는 이름과 성 사이에 ‘조지 윌리엄 피트’라는 웅장한 미들네임을 달고 살았다. 일가가 헤이에 정착한 것도 가문의 토지가 있어서였다. 부스는 옥스퍼드대(역사 전공)를 졸업한 뒤 한 회사 회계원으로 딱 3주간 일해보곤 곧장 헤이로 귀향했다. 그리곤 소방서를 사고, 극장을 사고, 빈 가게와 창고를 잇달아 사들여 모두 헌책방으로 개조했다. 70년대 말 그의 헌책방 6곳의 서가는 총 연장 16km(장서 110만 권)에 달했고, 그는 세계 최대ㆍ최다 헌책방 업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헤이 캐슬도 사들였다. 그는 헤이의 영주였다.

의붓딸(Lucia Stuart)의 도움을 받아 낸 1999년 자서전 ‘나의 책 왕국(My Kingdom of Books)’에서 그는 메이저들의 마이너가 아니라 마이너의 메이저로 살고 싶었다고 썼다. 그게 굳이 서점이었던 건 물론 그가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굳이 헌책이었던 건 주류에 떨려난 것들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싶어서였다. 헤이라는 공간도, 런던에 대면 헌책 같은 곳이었다. 그는 반항적인 영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서점을 다니던 추억이 옥스퍼드 대학가의 오래된 서점들을 누비며 되살아났다고도 했다. 그는 “새 책들의 상업적 동력(commercial dynamic)보다 수백 년 헌책 속에 쌓인 지적 동력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richardkingofhay.com)

헌책을 사 모으느라 국내외 안 다닌 곳이 없다지만, 대부분은 미국서 들여온 거였다. 60, 70년대 예산난에 허덕이던 러스트벨트 도시들의 공공도서관과 대학 도서관, 교회와 수도원 장서와 파산한 출판ㆍ유통업자들의 재고를 그는 ‘차떼기’로 사들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디트로이트가 없었다면 헤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같은 책이 수천 권씩 쌓일 때도 있었지만, 어쨌건 그의 헌책방은 규모나 장서 수준에서 웬만한 공공도서관을 압도했다. 영미와 호주 등 영어권 매체와 유럽 언론이 그와 그의 헌책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수 세기 동안 무덤처럼 고요하던 마을에 관광객이, 심지어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찾아 들기 시작했다. 헤이의 헌책방 대부분이 그 과정에 생겨났다. 외지에서 들어온 이도 있지만 대부분 부스의 책방에서 세포 분열하듯 독립한 서점들이었다. 2000년대 중반 헤이의 헌책방은 38곳에 달했다.

그림 2헤이온와이 거리의 무인 서가. 헌책방 서가에도 꽂히지 못한 헌책들이 저기서 새 주인을 만나기도 한다(사진 위). 아래 사진은 헤이의 범죄 스릴러 전문 헌책방 '머더 & 메이헴' 위키피디아, 플리커 사진.

부스를 ‘애서가’라 하긴 애매하다. 그는 기자들의 자신에 대한 선입견, 혹은 책을 물신처럼 경배하며 스스로의 지적 취미를 뽐내는 속물들을 조롱하듯, 차떼기로 산 책들을 차떼기로, 초벌 도배지 대용으로 도배업자한테도 팔고 땔감으로도 팔아치우곤 했다.

단위 마을 경제ㆍ개발 전문가로 연구차 부스를 자주 만나면서 친구가 됐다는 호주 그리피스대 경제학자 제인 프랭크(Jane Frank)는 부스가 어려서부터 책을 탐내긴 했지만 그건 책의 표지 장식과 멋진 삽화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책은 읽는 게 아니라 들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1980년 그를 인터뷰한 한 작가(Martin Amis)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그렇게 지독한 반지성주의자라는 데 놀랐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장난을 무척 즐겼고, 위악(僞惡)에도 능했다.

물론 저 말이 그의 진심일 수도 있다. 그는 “내 일은 육체노동 그 자체다.(…) 나는 인부 5명과 함께 글래스고, 맨체스터, 버밍엄 등지를 닷새 정도 누벼 컨테이너 가득 약 3만 권의 책을 사온다.(…) 책 10톤을 옮기는 일과 콩 통조림 10톤을 옮기는 게 뭐가 다른가.”라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책을 들고만 다녀선 옥스퍼드쯤 되는 대학서 역사를 전공하기 힘들 것이다. 그의 비서는 그가 실은 탐욕스러운 독서가였다고, 범죄스릴러 소설을 특히 좋아했고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고 말했다. 헤이에는 범죄소설 헌책방 ‘Murder & Mayhem(살인 & 범죄)’도 있었다.

1979년 즉위 3년차 '리처드 국왕' 부스. 오른쪽에 선 이는 왕관을 새로 제작한 '헤이 왕국' 기술부 장관(Reg Clark)이다. richardkingofhay.com

부스는 77년 만우절에 자신의 성 헤이캐슬에서 헤이왕국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국왕에 즉위했다. 장난 못지않게 주목 받는 걸 좋아했다는 그의 마을 홍보 이벤트였지만, 사사건건 간섭하는 주의회와 정부 특히 관광청의 행정ㆍ관료주의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평소 그는 친구와 주민들을 성에 초대해 왕처럼 호사스러운 파티를 벌이곤 했고, 값비싼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하도 험하게 타고 다니는 바람에 차 회사측에서 브랜드 품위를 위해 전액 환불-반품을 청하게 할 정도였다는 그다. 그는 즉위식에서 가짜 족제비털 망토에 골판지로 만든 조잡한 왕관을 썼고, 자신을 사자왕(LionHeart) 리처드 1세에 빗대 ‘책의 심장 리처드 국왕(King Richard Coeur de Livre)’이라 명명했다. 각료를 임명했고, 국기를 제정했고, 먹을 수 있는 종이(rice paper)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은 지폐를 발행했다. 헤이왕국의 국가정보기관은 ‘C.I.Hay’였다. 잡지 ‘보그’ 모델로도 일한 바 있는 트랜스젠더 여성 에이프릴 애슐리(April Ashley)는 국왕과의 각별한 친분 덕에 여공작 작위를 받았다. 충성심이 남달랐을 애슐리는 “내 성(性)도 바꿀 수 있는데, 헤이라고 왜 못 바꾸겠는가”라며 독립의 정당성을 힘차게 웅변했다. 헌책왕 부스는 “신이 부여한 왕의 권리는 공무원들의 권리보다 존엄하다”고 선포했고, “이미 계급 전쟁은 관료(주의)와의 전쟁으로 대체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ricahrdkingofhay.com) 하지만 그는 99년 웨일즈 주의회 선거에 사회주의자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고,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도 나섰다가 낙선했다. 마을 관광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4년 영국 왕실이 내린 기사 작위(MBE)도 그는 사양 않고 받았다

공연기획자 피터 플로렌스(Peter Florence, 1964~)가 영화배우인 영향력 있는 부모(Norman Florence, Rhoda Lewis)와 함께 1988년 ‘헤이스티벌’을 시작했다. 마을과 헌책을 사랑하는 이들끼리 모여 맥주 파티나 벌이자고 시작한 일에 작가들이 동참하고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판이 커졌고, 어느새 매해 공식 프로그램만 70~80건이 진행되는 세계적 문학 축제로 성장한 거였다. 지금까지 그 축제에 마야 안젤루, 마거릿 애트우드, 돈 드릴로, 도리스 레싱, 토니 모리슨, 페넬로페 리블리, 뮤리엘 스파크, 존 업다이크, 줄리언 반스, 가즈오 이시구로, 스티븐 프라이, P.D 제임스 등등이, 어떤 이들은 거의 매해 참가했고, 더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순수하게 즐기러 찾아오곤 한다. 과학자 스티븐 호킹과 프레드 호일,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이들도 찬조 출연했다. 영국의 ‘Institute of Art and Idea(IAI)’란 단체가 주최하는 철학-음악축제 ‘HowTheLightGetsIn Festival’도 2010년부터 헤이페스티벌 기간에 함께 열린다. 당대의 가장 논쟁적인 학자들이 그 축제의 연단에 서왔다.

부스는 처음엔 축제를 떨떠름하게 여겼다고 한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닌 탓도 있었겠지만, 헌책 마을의 정체성과 문학 축제의 기획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나는 헌 책을 썼다는 작가를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역 문화의 개성이 관광객을 끌어들일 테지만, 관광객들의 문화 때문에 지역 문화가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축제가 거스를 수 없이 커지고, 마을 경제에 보탬을 주면서 그도 축제에 동조했다.

국제책마을기구 명예회장으로서 2011 한국 파주 헤이리 '북소리' 축제에 참석한 부스. 98년 받은 뇌 양성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안면 기형이 생겼지만, 그는 말년까지 이런저런 행사에 부지런히 다녔다. 그의 마을 '헤이'와 파주 '헤이리'의 지명의 유사성은 우연이다. richardkingofhay.com

부스는 “나는 한 밑천 물려받아 두 배로 불린 뒤 네 배를 잃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탁월한 기획자였고 겁 없는 모험가였지만, 웨일즈의 ‘보카사’(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치스러운 독재자)라 불릴 만큼 사치스러웠고, 사업가로서의 역량도 열의도 부족했다. 한창때인 70년대 ‘헤이도서상협회’가 거래상들에게 “우리는 리처드 부스와 무관하다. 우리는 외상 없이 결재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적이 있을 정도였다. 2007년 이후 그는 자기 서점들을 팔았고, 2011년 성까지 판 뒤 헤이 인근 쿠솝(Cusop)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제인 프랭크 교수의 말처럼, 그가 ‘지방주의’라는 말조차 흔치 않던 60년대 초에 지역성과 다양성에 착안해 마을을 살리고 책마을 운동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사회사업가이고 활동가였다.

물론 마을의 성공을 아직 단언할 순 없다. 연중 60여 만 명의 관광객이 온다지만 절반 이상이 축제 기간에 몰려오고, 식당이나 수공예품 샵으로 업종을 바꾸는 헌책방도 늘고 있다. 마을 웹사이트에 따르면 현재 영업중인 헌책방은 스무 곳이 채 안 된다.(hay-on-wye.co.uk) 마을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Richard Booth’s Bookstore’를 인수한 미국인 사업가 엘리자베스 헤이콕스(Elizabeth Haycox)는 간판은 그대로 둔 채 서점 내부를 런던이나 뉴욕 스타일로 완전히 개조했다. 마을에선 문학축제 외에 재즈 등 음악콘서트와 음식 축제 등이 연중 열리고, 헌책방 투어와 역사문화유산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그렇게 부스는 헤이 이야기에서 조금씩 변두리로 밀려났다. 리처드 부스는 87년 결혼한 세 번째 아내인 프리랜스 사진작가 호프 스튜어트(Hope Stuart)와 해로했고, 8월 20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30년 넘게 스릴러 헌책방 ‘머더 & 메이햄’을 운영해온 데렉 애디먼(Derek Addyman)은 BBC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잃은 심정”이라고, “가게 진열장을 모두 검은 표지의 책들로 채울 참”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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