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첫 대면 “나와 무관” 발뺌하다 살인·강간 등 44건 범죄 시인
프로파일러 9명 설득에 흔들… 한순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성범죄 당시엔 친고죄 수사 난항… 공소시효 지나 신상공개도 어려워
30년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기억들은 머리 속에 또렷한 듯 했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말로 설명하다 안 되겠다 싶으면 “이 사건 당시 현장은 이런 모습이었다”며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영화 ‘암수살인’에서 연쇄 살인범이 형사에게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이춘재(56)는 그런 방식으로 화성연쇄살인 사건은 물론, 그 이외 5건 다른 범죄와 강간 등 성범죄 30건에 대해도 모두 자백했다. 1986년 1월 군 제대 이후 1994년 처제 살인으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자신이 저지른 8년간의 범행이었다.
2일 경기남부경찰청에 따르면 이춘재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5ㆍ7ㆍ9차 화성연쇄살인 사건 피해자의 유류품에서 채취한 DNA가 이춘재의 DNA와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들이밀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경찰은 지난달 19일 이춘재가 수감되어 있는 부산교도소를 방문, 첫 대면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이춘재는 처음엔 “나와 무관한 사건”이라 버텼지만 프로파일러가 최대 9명까지 투입되고 대면조사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등하던 이춘재는 순간 “DNA가 나왔다니 어쩔 수 없네요”라더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자백을 시작했다. 경찰 관계자는 “대략 지난 주부터 이춘재가 심경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뒤 사건에 대해 자백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춘재의 자백은 경찰이 구체적 사건에 대해 물어보면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화성살인 9건, 화성 전후 사건 5건 등 모두 14건의 성폭행 살인을 저질렀다”, “처제 살해 전까지 경기 화성시와 충북 청주시 일대에서 30건 정도의 강간 및 강간미수 사건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캐묻지 않아도 이춘재 스스로가 자신의 범행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미처 관련 사건에 대한 검토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던가 할 경우 이춘재가 나서서 “당시 주변 상황이 이랬다”며 해당 장소를 그림으로 직접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이춘재의 이런 자백 스타일을 두고 경찰 안팎에서는 이춘재가 자신의 범행에 대해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13명을 살해한 정남규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관련 정황을 또렷하게 진술하면서 ‘살인에 대한 자부심’을 언급하기도 했다.
경찰은 다시 바빠졌다. 경찰 관계자는 “자백했다지만 오래 전 기억에 따른 진술이라 당시 사건 자료 등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진위 여부를 확인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사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부 오래된 사건인데다 강간 등은 당시 친고죄여서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없었다면 수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공소시효도 다 지났다.
이 때문에 진실규명을 위해서라도 이춘재에 대한 신상공개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공소시효 문제로 처벌이나 신상공개가 어렵다면 경찰이 진상규명 차원의 현장검증을 추진하면서 자연스레 신상공개를 할 수 있다”며 “원혼을 달래고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원=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수원=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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