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수마트라 열대림 이탄지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지구의 허파’가 불타고 있다. 아마존 산불 얘기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도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한쪽 허파가 있다. ‘열대림 이탄지(泥炭地ㆍpeatland)’라는 낯선 땅이다. 최근 두 달간 서울시 넓이(605.5㎢)의 5배가 넘는 인도네시아 열대림(3,300㎢)이 잿더미가 됐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재앙이 인간의 일상을 집어삼키는 역설 속에서, 관리 및 복원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열대림 화재가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달 말 수마트라 잠비주(州) 현장을 찾았다.
잠비 시내에서 40㎞ 떨어진 타만 라조 지역의 팜오일 농장은 사방 지평선 너머까지 푸르렀다. 농장으로부터 50㎞ 지점에서 마주한, 면적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탄 흑색 폐허(본보 9월 23일자 1, 8면 참고)와 비교하면 별세계였다. 팜오일 나무가 자라는 61.91㎢ 면적 중 30%가량이 이탄지다. 2011년 정부 허가를 받은 이 대형 농장의 관계자와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2시간 가까이 농장을 둘러보며 설명한 관리 실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탄지를 알아야 한다.
이탄지는 식물 잔해와 동물 및 곤충 사체가 완전히 분해되지 못하고 수천~수만 년 쌓인 유기물 토지다. 1m 퇴적에 대략 1,000년이 걸린다. 습지의 하위 개념이지만 우리나라 습지와는 다르다. 인도네시아는 남한 면적(10만㎢)의 두 배에 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탄지(20만㎢)를 보유하고 있다. 열대림 이탄지만 따지면 전세계 열대림 이탄지(42만㎢)의 약 절반 넓이다.
수마트라와 칼리만탄, 파푸아에 분포하는 인도네시아 이탄지는 고(高)탄소 저장 생태계다. 탄소 저장 능력이 일반 토양의 10배 이상이다. 전세계 이탄지 탄소 저장량의 8~14%(약 460억톤)를 차지한다. 오랑우탄, 수마트라 호랑이, 말레이곰(태양곰) 등 주요 멸종 위기 동물과 희귀종이 서식하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다.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 차원에서도 보호와 복원이 시급한 곳이다.
이탄지 관리의 핵심은 적절한 수위 조절이다. 물이 너무 많으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물이 부족하면 대형 화재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실제 화전을 일구려는 현지인들은 먼저 이탄지의 물을 빼고 불을 지른다. 인화성이 강해서 일단 불이 붙으면 잘 꺼지지 않고, 지상의 불을 끄더라도 지하에 불이 살아 있다. 이탄지 수위 조절을 위한 수로가 주민들의 교통로로 이용되는 상황도 이탄지 황폐화를 부추기고 있다.
농장 지배인 사와루딘씨는 “물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상태인지 센서가 부착된 장치로 상시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 권고 기준은 수심 40㎝ 정도다. 수심 측정 장치가 들어 있는 철제 상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탄지에 물을 빼고 채우는 수문 역시 수위를 조절한다.
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들은 특히 이탄지 침하 현상을 우려했다. 이 농장의 이탄지는 2007년보다 20㎝나 내려앉아 있었다. 이탄지 안에 실로 이어 설치한 눈금을 살펴본 아스카리 산림환경부 이탄지생태보전과장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했다. 농장 관계자는 “해가 갈수록 땅이 꺼지는 속도가 빨라져 걱정”이라고 답했다. 이탄지 침하는 우기 시 홍수를 유발하고, 배수로를 훼손하는 주범이다.
이 농장의 이탄지 깊이는 측정 결과 2~3m였다. 적어도 2,000~3000년 전부터 생성됐다는 뜻이다. 안이 빈 철제 막대로 뽑아낸 이탄지 흙은 초콜릿색으로 미끌미끌하고 촉촉했다. 농장 관계자는 “네덜란드 식민 시절엔 유럽으로 가는 상선들이 유기물이 풍부한 이탄지 물을 사서 배에 싣기도 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독립 선포 전까지 350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농장엔 500m 간격으로 15m 높이의 화재 감시탑이 서 있다. 꼭대기에 올라가도 농장 전체가 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농장의 팜 오일 처리 용량은 시간당 60톤, 팜 열매를 찌는 과정에서 나오는 연기가 주변 하늘을 뒤덮었다. 그나마 낫다고 소개받은 대형 농장의 수준이 이 정도니 아직 갈 길이 멀다. 현재 인도네시아 이탄지 복원 성공 사례는 일본 업체가 써 내려가고 있다. 우리에겐 생소한 땅이지만 일본엔 이탄지협회까지 있다고 한다.
팜오일 농장은 이탄지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열대림 화재의 주범으로 꼽힌다. 대기업들은 관리를 그래도 잘 하는 편이지만, 경작 범위를 넓히려는 중형 농장이 의심받는 방화나 먹고 살기 위한 주민들의 소규모 화전이 연례행사처럼 벌어지고 있다. 팜오일 산업이 급증하는 만큼 이탄지는 급격히 파괴돼 줄고 있는 셈이다. 올해는 건기가 길어지면서 이웃나라들까지 화재 연무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방화 처벌 기준을 높이고 있지만 현장에선 잘 먹히지 않는다. “주로 화교들이 운영하는 농장들은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불을 지르게(청부 방화) 한 뒤 책임을 떠넘긴다”는 게 현지인들 얘기다. 부패한 공무원들과의 결탁설도 빠지지 않는다. 기자가 만난 현지 공무원 역시 정부의 방화범 체포 현황 발표에 심드렁했다. “여기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탄지 농작물 재배는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농업 방식이기도 하다. 대대로 이어져 온 오랜 관습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도네시아는 팜오일 생산 세계 1위로, 수백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임영석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 임무관(林務管)이 말했다. “팜오일 농장을 더 확대하는 것은 지구 환경에 좋지 않다. 그러나 대두, 해바라기, 유채 등 다른 식물성 기름보다 단위생산성이 월등히 높아 저개발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값싼 기름을 공급하는 팜오일의 장점도 무시할 수 없다. 현 팜오일 농장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이탄지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작물을 재배하도록 유도하면서 이탄지를 관리ㆍ복원하는 방법이 인간과 지구 환경을 위한 현명한 접근이다.” 어렵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가야 할 길이다.
수마트라 잠비(인도네시아)=글ㆍ사진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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