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인 지난해 10월 2일.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는 결혼 관련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터키 수도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 총영사관을 방문했다. 그를 감시해온 사우디 정보기관 요원들은 카슈끄지를 총영사관에서 납치한 뒤 무참하게 살해했다. 터키 정부는 배후로 사우디 왕실을 지목했으나 사우디 정부는 이를 부정했고, 살해 현장 음성 파일의 존재가 드러나고 나서야 사우디는 현장 책임자가 살해를 지시했다고 말을 바꿨다.
정부 비판적 기사를 써온 언론인이 자신의 조국에 의해, 그것도 제3국 공관에서 살해되며 사우디 정부의 야만성을 부각시킨 ‘카슈끄지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 흘렀지만 이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어떤 주장도 꺾이지 않고, 사건의 구체적 전모가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동안 미국은 자국 무기를 사들인 사우디에 사실상 면죄부를 선사했고, 자국 영토 내에서 벌어진 범죄에 분노했던 터키도 사우디와의 관계를 고려해 압박을 완화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카슈끄지의 아들 조차 사우디 왕실을 옹호하고 나섰다. 사우디 왕실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로선 외교적 면죄부는 얻은 셈이나, 야만적 범죄를 직접 지시했거나 최소 은폐하려 했던 지도자라는 꼬리표는 떼어내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 뒤따른다.
빈살만 왕세자는 카슈끄지 사건 1주년을 의식한 듯 미국 CBS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인터뷰를 갖고 자신이 카슈끄지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과 관련 “결코 그렇지 않다”며 거듭 혐의를 부인했다. “내 감시 하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책임 또한 내게 있다”면서도 “직접적인 살해 지시는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카슈끄지 사건 1주년에 되레 서방 언론과 인터뷰를 자처한 그의 행동은 주변국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카슈끄지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들끓던 지난해 11월 사우디는 17조원 규모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를 사들여 미국의 환심을 산 데 이어, 최근 양국은 대(對)이란 공동 전선을 형성,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살해 당시 녹음 파일을 들이밀며 사우디 왕실을 곤경에 빠뜨렸던 터키도 사우디 압박에서 한 발 빼는 기색이 역력하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그런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게 인류 모두의 이익”이라면서도 “우리는 사우디 국왕을 흉악한 살해범과 구분하고 있다”고 했다. 왕실 개입은 없었다는 사우디 측 입장에 손을 들어준 발언이다.
그간 선친 죽음에 대해 말을 아꼈던 카슈끄지 아들 살라도 1일 자신의 트위터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1년 간 사방에 있는 우리나라의 적들이 조국과 지도자(왕실)을 깎아 내리기 위해 아버지 죽음을 악용했다”고 썼다. 선친 죽음에 왕실의 개입은 없었다는 뜻이다.
반면 자신의 약혼자가 살해됐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영사관 바깥에서 카슈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약혼녀 하티즈 젠기스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지난달 30일 DP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은 (나에게) 여전히 투쟁이고 싸움”이라고 밝혔다. 젠기스는 “카슈끄지의 시신은 지금까지 찾을 수 없고 누구도 그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고 있다”며 “카슈끄지 사건은 사우디를 끝끝내 괴롭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WP는 논평을 통해 “사우디 왕실은 현재도 여성 인권 탄압과 예멘 내전 개입으로 비판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인권 탄압을 멈추라던 카슈끄지의 경고는 결국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며 “카슈끄지와 빈살만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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