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총회 기간이던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 각국 정상이 모여 세계 평화를 논의하는 동안, 바로 길 건너편 밀레니엄 힐튼 호텔의 한 회의실에는 비밀리에 보안 통신선이 설치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세계를 중동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미국과 이란 두 정상의 통화를 위해,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머물던 호텔에 전화선이 놓였던 것이다.
뉴요커와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0일 소식통들을 인용해 할리우드 첩보 영화를 방불케하는 이 같은 외교 작전의 전모를 소개하면서 배후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하니 대통령과의 3자 전화 회담의 주선자로 나선 마크롱은 이날 로하니를 설득하기 위해 소수 측근만 대동한 채 직접 호텔을 찾기까지 했다.
그러나 로하니가 퇴짜를 놓으면서 끝내 통화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날 오후 9시 30분 전화벨이 울렸고, 트럼프와 마크롱은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자신의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갔던 로하니는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스위트룸 밖에서 기다리던 마크롱은 빈손으로 호텔을 떠났고, 전화 제의에 응한 트럼프 대통령도 체면을 구기게 됐다.
지난 몇 달간 마크롱은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지난해 5월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란 핵 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다. 최근에는 미국이 대(對) 이란 제재를 완화하는 대신, 이란은 JCPOA를 원래대로 준수하고 보다 포괄적인 새 협상에 나서는 조건을 양측에 중재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에만 최소 16개의 대이란 제재 조치를 단행한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유엔 연설에서도 “이란의 위협적인 행동이 계속되는 한 제재는 해제되지 않을 것이며 강화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와 관련, 외교 소식통들은 한 목소리로 로하니가 ‘제재 완화’라는 확답을 받기 전까지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설명한다. 소득은 없이 트럼프에게 외교적 성과만 가져다주는 꼴이 될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또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을 앞둔 로하니로서는 미국과의 어떤 접촉이든 이란 내 강경파들에게 공격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지난 2013년에도 로하니는 유엔에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로하니는 25일 유엔 연설에서 직접 트럼프를 향해 “당신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더 많이 내놓아야 한다”라면서 미국의 선(先) 제재 완화를 강조했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일을 두고,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국내 정치에서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를 위해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준 일화라고 평했다. 정치 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의 클리프 쿱찬은 NYT에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에서 특히 필사적이었다”라며 “우크라이나 스캔들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로하니와의 극적인 만남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