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선정, 문학의 향기 그윽한 가을 여행지
가을은 책갈피 사이로 온다. 고르고 고른 시어 하나와 잘 다듬은 문장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음이 살찌는 계절, 한국관광공사가 10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문학의 향기 그윽한 가을 여행지를 선정했다.
◇법정 스님 무소유의 삶, 서울 성북동 길상사
길상사는 20년 남짓 된 사찰이지만 이야깃거리가 많다. 원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는데 주인인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절이 됐다.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한 법정은 ‘무소유’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 등으로 독자에게 깊은 감명과 울림을 전했다. 김영한도 ‘무소유’를 읽고 감동해 시주를 결심했다. 시가 1,000억원이 넘는 물건이었으니 둘 사이 권유와 거절이 10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한다.
길상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진영각에는 스님의 영정과 친필 원고, 유언장 등이 전시돼 있다. 스님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준비하지 말며, 승복을 입은 채로 다비하라”고 유언했다. 유골은 진영각 오른편 담장 아래에 모셨다. 생전에 스님이 앉았던 나무 의자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김영한은 백석 시인의 연인 ‘자야’라는 아호로도 널리 알려졌다. 둘의 사랑은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길상헌 뒤편에 ‘시주길상화공덕비’가 있다. 길상화는 법정이 김영한에게 준 법명이다. 공덕비 옆 안내판에 김영한의 생애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새겨져 있다.
길상사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한 작품이다. 경내는 잘 가꾼 정원 같다. 고목이 많고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진다. 2016년 새로 단장한 도서관은 북카페 ‘다라니다원’으로 운영된다. 차 한잔 마시며 법정의 글을 읽기 좋다.
◇전철 타고 떠나는 이야기 마을, 춘천 김유정문학촌
김유정은 채 서른 해를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소설은 우리말의 보물 창고로 남아 있다.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의 김유정문학촌에 들어서면 너른 잔디밭에 그의 대표작 ‘봄.봄’ 속 캐릭터가 방문객을 맞는다. 빙장어른이 점순이와 혼례를 미끼로 예비 데릴사위를 부려 먹는 장면, 점순이의 작은 키를 핑계 삼아 혼인을 차일피일 미루는 장면, 결국 폭발한 예비 사위가 빙장어른의 ‘거시기’를 잡고 흔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김유정이 태어난 집이다. 실레마을에서 제일가는 지주 집안이던 그의 생가는 웬만한 기와집보다 크지만 한옥에 초가지붕이다. 마을에 위화감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가옥을 ‘ㅁ 자형’으로 배치한 것도 집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다. 네모난 하늘이 보이는 툇마루에서 문화해설사가 하루 7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유정의 많은 작품이 이곳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마을과 산길을 따라가면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근식이가 자기 집 솥 훔치던 한숨길’ 등 실레이야기길 열여섯 마당이 펼쳐진다. ‘김유정이야기집’에서는 ‘봄.봄’과 ‘동백꽃’을 애니메이션으로 감상할 수 있다. 전철 김유정역에는 북카페로 꾸민 무궁화호 열차가 있다. 주변을 감각적인 조형물로 단장해 카메라를 들고 찾는 이가 많다.
◇옛 고향 찾아가는 길, 옥천 정지용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의 ‘향수’는 가곡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잊히는 고향 풍경이 그림처럼 아련하게 떠오른다.
옥천 구읍의 정지용생가와 문학관으로 가는 길도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옥천의 중심지였지만, 1905년 금구리에 경부선 옥천역이 들어서며 쇠락해 구읍이라 불린다. 구읍에 들어서면 가게는 낡았지만, 정지용의 시어를 인용한 세련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담배 가게에는 ‘오월 소식’ 중 ‘모초롬 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란 구절이 걸려 있다. 실개천 옆에 자리한 초가지붕이 정지용생가다.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면 세 칸 초가와 창고가 마주 본다. 안방에는 동시 ‘호수’가 걸려 있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생가 바로 옆에 문학관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지용 밀랍인형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다. 시 낭송실에서는 마이크를 잡고 주옥 같은 시어로 빛나는 그의 작품을 낭랑하게 읊어볼 수 있다. 문학관에서 약 10km 떨어진 금강 변 장계국민관광지에는 다양한 공간 예술품으로 정지용의 시를 재해석해 놓았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안동 권정생동화나라
권정생동화나라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공간이다. 평생 아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문학과 삶이 담겨 있다. 동화나라가 자리한 안동 일직면 망호리는 ‘몽실언니’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폐교를 개조한 권정생동화나라 초입에는 ‘강아지똥’ ‘몽실언니’ ‘엄마까투리’ 등 작품 속 조형물이 소박하게 놓여 있다. 1층 전시실에는 그의 일기장과 유언장, 살아온 발자취가 시기별로 진열돼 있다.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희망과 올바른 세상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던 그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은 가슴 뭉클하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광복 후 귀국해 어린 나이에 나무 장사와 고구마 장사에 나서는 등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결핵을 앓았고, 한쪽 콩팥과 방광을 들어낸 후 말년까지 병마와 싸웠다. 유명 작가가 된 후에도 허물어질 듯한 오두막에서 자발적 가난을 이어갔다. 삶 자체가 성직자였고, 아동문학의 자양분이었다.
전시실에 보관된 유언장에는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적혀 있다. 전시실 한쪽에 그가 살던 오두막집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았다. 비료 포대로 만든 부채, 몽당연필 등을 보노라면 그의 지독한 언행일치가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동화나라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북녘 어린이 돕기에 쓰인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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