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2막] 세월만큼 묵직한 인생 드라마 “일흔, 영화감독하기 딱 좋은 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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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2막] 세월만큼 묵직한 인생 드라마 “일흔, 영화감독하기 딱 좋은 나이지”

입력
2019.10.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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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미디어센터 실버영상제작단 

“나이 들면 일상이 무료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뭐든 배우고 도전하세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니까요.” 성남미디어센터 실버영상제작단에서 활동 중인 김애송(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ㆍ강여실ㆍ김효순ㆍ신정수ㆍ조상아씨가 귀띔한 ‘즐거운 인생 2막’의 비결이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영상 제작을 하려면 프리미어(편집 프로그램)부터 배워야죠. 프리미어는 기본 중에 기본이에요.” “그래도 프리미어 편집은 할 만한데 시나리오와 콘티가 가장 어려워요.” “요즘엔 디지털로 찍으니 한결 편하죠. 예전 8㎜로 찍은 영상을 6㎜로 변환했다가 다시 USB로 옮기고 있는데… 아유, 작업 양이 어마어마해요.”

오고 가는 이야기에서 전문 용어가 마구 튀어나온다. 영상이라곤 스마트폰 동영상 찍어 본 게 전부인 문외한에겐 ‘외계어’나 다름없다. 충무로 감독이나 스태프가 아닌, 70대 어르신들의 대화라니. 선입견이 와장창 깨지며 ‘동공 지진’이 일어나던 순간,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젊은 기자 양반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 쉽게 설명해 줍시다.”

세간엔 ‘늦었다고 생각할 때 이미 늦었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된다. 그러나 성남미디어센터 실버영상제작단 소속 늦깎이 감독들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이를 먹어도 꿈을 펼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그러니 “당신에게 숨겨진 재능을 지금이라도 발견해 보라”고 말이다. 나아가 이 말을 실력으로 멋지게 증명해 냈다. 지난해 제11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단편 영화 ‘아버지와 아버님’(감독 김애송)으로 대상을, 단편 다큐멘터리 ‘오늘의 꽃’(감독 강여실)으로 우수상을 받으며 1, 2등을 동시에 거머쥔 것이다.

지난해 서울노인영화제에서 단편 다큐멘터리 ‘오늘의 꽃’으로 우수상을 받은 강여실씨(왼쪽)와 단편 영화 ‘아버지와 아버님’으로 대상을 거머쥔 김애송씨는 수상의 순간을 추억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서재훈 기자

 ◇호기심에서 출발해 감독 데뷔까지 

경기 성남시 성남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성남미디어센터 내에서 실버영상제작단은 ‘핵인싸(유행을 매우 잘 따라가는 사람)’다. 수상 성과도 빛나지만, 열정과 적극성 면에서 다른 팀들이 따라올 수가 없다고 한다. 실버영상제작단은 다시 ‘좋은 친구들’과 ‘럭키 세븐’, 두 팀으로 나뉘어 활동 중이다. ‘아버지와 아버님’을 좋은 친구들 팀이, ‘오늘의 꽃’을 럭키 세븐 팀이 만들었다. 한 사람이 연출을 맡으면 팀원들이 촬영, 연기, 섭외 등을 담당한다. 오랜만에 모인 좋은 친구들 팀의 신정수(76)ㆍ김애송(69)ㆍ조상아(78)씨, 럭키 세븐 팀의 강여실(71)ㆍ김효순(72)씨는 1년 전 수상의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도전에 의미를 뒀던 거라 수상은 기대하지 않았어요. 본선에 올라가면 서울시장상을 주더라고요. 박원순 시장에게 상을 받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대상에 호명되니 아주 난리가 났죠.”(김애송) “1, 2등 발표를 앞둔 상황에서 실버영상제작단 영화 두 편만 남은 거예요. 그때부터 덜덜 떨리더라고. 대상 받으면 더 좋았겠지만 우수상 받은 것도 기적 같아요.”(강여실) 대상 상금 400만원과 우수상 상금 100만원은 모든 팀원이 나눠 갖고, 일부는 제작비로 적립해 뒀다. “이 나이에 이런 큰 상을 받다니. 인생에서 마지막 영광이 아닐까 싶어요.”(김애송) “아유, 무슨 말씀을. 우리도 할리우드 구경해 봐야죠.”(조상아)

‘좋은 친구들’ 팀의 신정수(왼쪽부터)ㆍ김애송ㆍ조상아씨.
‘럭키 세븐’ 팀의 강여실(왼쪽)ㆍ김효순씨.

실버영상제작단에 참여하기 전까지 ‘감독’이란 호칭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영화나 영상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강여실ㆍ김효순ㆍ조상아씨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평범한 주부였고, 개인 사업을 하던 신정수씨와 교육계에 종사한 김애송씨는 수년 전 현업에서 은퇴했다. 자녀를 결혼시키고 손주까지 돌보다 60대 중후반에 처음 카메라를 잡았다. 시작은 사소한 호기심이었다.

강여실씨는 2015년 봉사하러 다니던 복지관에서 실버영상제작단 모집 포스터를 보고 흥미를 느껴 도전했다. 김효순씨는 복지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다 강여실씨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덤볐어요. 낯선 세계를 알아 간다는 게 얼마나 즐겁던지. 조금만 젊었더라면 전공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신정수씨는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 그 사진으로 영상을 만들 결심을 했다. 조상아씨도 가족 여행을 담은 홈비디오를 정리하려고 영상 편집을 배우게 됐다. 두 사람은 성남문화원 영상반에서 활동하다가 2012년 성남미디어센터가 개관하면서 실버영상제작단으로 초빙됐다. ‘성남미디어센터의 문을 연 원년 멤버’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김애송씨의 사연도 뭉클하다. 딸의 결혼식에서 하객에게 보여 줄 신부 소개 영상을 직접 만들고 싶어서 지인인 신정수 단장에게 도움을 청한 게 시작이었다. “딸이 무척 기뻐했어요. 하객에게 엄마가 만든 영상이라고 소개도 하고요.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면서 성취감도 느꼈어요.”

실버영상제작단 어르신들은 영상 편집 프로그램도 능숙하게 다룬다. 15분 단편영화를 만들 경우, 편집에만 한 달 가량 걸린다고 한다. 서재훈 기자

 ◇카메라로 만나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를 만나면서 삶이 달라졌다. 이젠 TV드라마도 감독의 눈으로 본다. 신정수씨는 “화면만 봐도 카메라는 어떤 기종을 썼는지 짐작이 되고, 색다른 구도나 효과는 눈여겨봤다가 나중에 영상 제작에 참고한다”고 말했다.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영화제로 워크숍도 간다. 올해는 무주산골영화제에 다녀왔다. 영화도 자주 본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도 관람했다. “봉준호 감독이 스태프의 끼니를 그렇게 잘 챙긴다면서요.” “우리도 밥은 거르지 않잖아. 봉 감독 부럽지 않지.” 유쾌한 농담 끝에 ‘와하하’ 폭소가 터진다.

주변 모든 것들은 영화 소재다. 사소한 이야기도 흘려 듣지 않는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유쾌한 동거를 그린 ‘아버지와 아버님’도 김애송씨가 지인의 실제 사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성남시에 사후유산기증을 약속한 80대 홍계향 어르신의 삶을 다룬 ‘오늘의 꽃’은 강여실씨의 지인 이야기다. 두 영화 모두 15분 남짓한 짧은 이야기지만, 묵직한 인생 드라마가 감동을 안긴다.

물론 고충도 있다. 체력이 가장 큰 문제다. 카메라가 가벼워졌다고는 해도 오래 들고 있으면 힘에 부치고, 밤 새워 편집을 하면 눈도 침침하다. 신정수씨는 새 단편 영화 ‘배드 댄스 굿 댄스’를 찍다가 탈진했다고 한다. 카메라 작동법이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 “프리미어를 처음 배울 땐 3개월짜리 강좌를 세 번 반복해서 수강했어요. 아무래도 젊은이보다는 모든 게 더디죠. 까먹으면 다시 배우면서 촬영하는 거예요.”(조상아) “예전엔 콘티도 신문에서 이미지를 잘라 붙여서 만들었어요. 요샌 컴퓨터로도 작업하고, 그림 대신 글로 정리하기도 해요. 그렇게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아 가고 있죠.”(강여실)

요즘에는 성남의 마을ㆍ사람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 영상을 성남지역방송인 아름방송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에 출품하는데 채택률이 매우 높다. 방영료는 고스란히 제작비로 쓴다. “자부심을 갖고 하는 일이지만 과정은 쉽지 않아요. 인터뷰를 요청하면 위아래로 죽 훑어봐요. 노인들이 카메라 들고 뭐하는 짓인가 하는 눈빛이죠. 인터뷰를 거부당할 땐 회의감에 정말 힘듭니다. 성남시민들이 실버영상제작단을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줬으면 합니다.”(신정수)

대본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촬영 장비를 든 자세도 안정적이다. 실버영상제작단이 그동안 영상 제작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는지 말해 준다. 서재훈 기자

 ◇진짜 인생은 은퇴 이후 시작된다 

새로운 도전에는 때때로 쓴맛이 뒤따르지만 그 쓴맛 덕분에 인생이 달콤한 거라고 실버영상제작단은 말한다. 꿈이 있다면 ‘언제나 청춘’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세상 속으로 나간다. “영상을 만나면서 제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어요. 말년에 영화 주연도 하고, 방송에도 나오잖아요. 힐링이 돼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젊음과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김효순) “내가 이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구나, 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고 할까요. 자존감도 높아져요. 손주들이 ‘우리 할머니는 컴퓨터도 잘 다룬다’면서 친구들에게 자랑도 한대요.”(강여실)

마지막으로 신명 나는 인생 2막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새로운 길은 문밖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집에만 있으면 병을 얻을 뿐이에요. 늦은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 겁내지 마세요. 노래든, 춤이든, 뭐든 배우세요. 봉사활동을 해도 좋아요. 복지관은 주변에 널려 있어요. 자신을 과감하게 표현하세요.”(김애송) “진짜 인생은 은퇴 이후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하고 집안일도 줄어드니 얼마나 자유로운지요. 그 자유가 정말 꿀맛 같아요. 그때부터는 내 세상이죠.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보세요.”(조상아)

성남=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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