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해외 로케이션은 없다. 고층 사무빌딩에서 만난 도시남녀가 유창한 영어 섞인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물량공세도 없다. 주요 배경은 옹산이라는 가상의 지방 소도시. 평범한 사람들이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정을 나누거나 싸운다. 대작도 아니고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하지도 않았는데, 요즘 가장 눈에 띄는 드라마로 꼽힌다.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다.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연쇄살인 설정을 얹은 ‘동백꽃 필 무렵’이 화제다. 곳곳에서 “그 드라마 봤느냐”는 말이 오간다. 시청률이 이 드라마의 수직상승을 대변한다. 18일 첫 방송에서 6.3%(닐슨코리아 집계)를 기록한 후 25일 6회에서 10%에 도달했다. 같은 시간대 경쟁하는 SBS ‘시크릿 부티크’(4.9%)보다 2배 이상 높고, 제작비 250억원 대작인 SBS ‘배가본드’(10.2%)와 엇비슷하다. 시청자의 귀를 쫑긋거리게 하는 맛깔스런 대사와 출연진의 호연, 매끄러운 연출이 어우러지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의 위기가 현실이 된 가운데, 대규모 자본 없이도 참신한 이야기면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드라마는 서울에서 경찰 생활하다 고향 옹산으로 좌천된 황용식(강하늘)과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동백(공효진)이 벌이는 사랑의 줄다리기를 뼈대로 한다. 동백을 은근슬쩍 넘보는 지역유지 노규태(오정세)의 비릿한 면모와, 동백의 첫사랑 강종렬(김지석)의 사연이 포개지고, 연쇄살인마 까불이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겹치면서 웃음과 서늘함을 빚어낸다. “이 남자는 돌직구도 아니고 투포환급이다”처럼 짧고 재치 넘치는 대사가 꼬리를 문다.
제작진과 배우는 임상춘 작가를 인기의 일등공신으로 꼽는다. 임 작가는 2014년 MBC 추석 특집 단막극 ‘내 인생의 혹’으로 데뷔했다.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드라마는 KBS2 ‘백희가 돌아왔다’(2016)였다.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후속이 늦어져 긴급 편성된 4부작이었다. 짧은 방영 기간이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마지막 회 시청률이 10.4%에 달했고, 다음 해 특별 편성까지 됐다. 미니시리즈 데뷔작인 ‘쌈, 마이웨이’(2017)도 최고 시청률 13.8%를 거뒀다. 모두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문보현 KBS 드라마센터장은 “작은 사건만으로도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내는 데 독보적”이라며 “사회적 약자를 응원하는 따뜻한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저작권 한국일보]KBS2 ‘동백꽃 필 무렵’ 명대사. 그래픽=김경진 기자](http://newsimg.hankookilbo.com/2019/09/30/201909301782358362_10.jpg)
드라마 배경인 충청도는 임 작가의 고향이다. 사투리 특유의 말맛과 향토색 물씬 풍기는 분위기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임 작가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30대 중반의 여성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이름조차 필명이다. 작가는 드라마로만 이야기한다는 생각에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린다. KBS 내에서도 제작진 소수만이 그와 소통하고 있다. ‘백희가 돌아왔다’부터 임 작가와 함께 일해 온 이건준 KBS CP는 “2017년 7월 ‘쌈, 마이웨이’가 종영한 후, 그해 말부터 ‘동백꽃 필 무렵’의 제작 논의를 시작했다”며 “평소 입담이 좋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도 깊은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임 작가는 줄곧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소외된 인물의 가치를 다루며 다른 드라마와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며 “서울보다는 시골 동네, 도회적 인물 대신 시골 소시민을 다루는 등 최근 드라마 흐름과 다르면서도, 시청자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임 작가의 공력을 엿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연기력도 빼놓을 수 없다. 제작진은 기획 단계부터 공효진을 주연으로 염두에 뒀다. 그가 전작에서 선보인 솔직하고 당찬 모습을 대본에 녹였다는 설명이다. 공효진의 연기가 더 빛을 발할 수 밖에 없는 제작 요건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 시골 청년 황용식을 맡은 강하늘의 연기도 발군”이라고 평가했다.
KBS도 공을 들였다. 글로벌 동영상스트리밍업체(OTT) 넷플릭스와 동시 방영하는 첫 작품일 정도다. 넷플릭스와 협상 과정에서는 KBS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보통 외주제작사가 나서서 넷플릭스와 계약한다는 점을 비춰봤을 때 이례적이다. KBS 관계자는 “캐스팅 및 미술 비용 등 기존 KBS 드라마에 비해 ‘동백꽃 필 무렵’ 제작비가 많았으나, 흔히 말하는 대작 드라마는 아니다”며 “임 작가 작품이라는 이름값과 공효진과 강하늘이라는 쟁쟁한 배우가 출연한다는 점이 계약 성사로 이어진 이유”라고 설명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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