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헌 고려대 교수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 해체’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GDP(국내총생산) 지표가 높다고 그 나라 국민들이 ‘잘 산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성장의 과실이 독점되고, 분배를 기대하기는커녕 착취와 차별로 억압 당하는 구조라면. 제대로 된 성장이라 말할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논란의 책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을 비롯해 식민지근대화론을 추종하는 이들은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경제가 발전했고 근대화의 토대를 닦았다고 주장한다. 한국근현대사를 경제사 중심으로 연구해온 정태헌 고려대 교수가 쓴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 해체’는 그들이 말하는 성장의 허구를 정면으로 반박한 책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시리즈 중 하나로 최근 출간됐다.
정 교수는 책에서 우선 ‘어떤 성장인가’를 되묻는다.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역사의식에는 어떻게, 왜 성장했는가는 물론 성장의 귀결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고 지적한다. 제국주의에서 식민지 개발과 수탈은 동전의 양면이다. 식민지 수탈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자본주의를 이식해 식민지를 개발하고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철저히 일본 경제와 일본 자본가들을 위해 조선을 이용했다.
공업과 금융은 식민지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일본이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을 설립한 배경은 본국 일본 통화의 교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서구의 화폐발행제도는 금본위제도였지만, 조선은행은 일본 통화인 엔(¥)본위제도로 운영됐다. 조선은행은 독자적으로 통화량을 조정할 수도 없었다. 중국 침략 등으로 통화수요가 급증하자 일본은 조선은행에서 돈을 마구잡이로 끌어다 썼다. 조선에 남은 건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가난뿐이었다.
공업화 역시 일본의 ‘필요’에 의해 추진됐다. 중공업에 치중한 일본 경제는 대공황으로 세계 시장의 활로가 막히자 ‘일본 조선 만주’를 아우른 자급자족적 일본경제권에서 돌파구를 모색한다. 조선은 만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하청단지로 활용됐다. 정 교수는 일본이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한 배경에 대해 “일본의 중공업제품을 소화하고, 고도화되는 산업 구조 수요 속에 종속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낮은 수준의 공업화가 필요했던 것뿐”이라고 분석했다.
교육과 의료 혜택에서도 민족 차별은 엄존했다. 일본은 동화정책을 펴면서도 정작 ‘국민화’의 핵심인 의무교육과 참정권 대상에서 조선인을 제외했다.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은 그림의 떡이었다. 굶주림과 생활고에 못 견딘 당시 조선 인구의 10% 이상이 일본, 만주 등 국외로 이주하는 디아스포라의 길을 택한 배경이다.
정 교수는 양적 성장을 중시하는 근대주의를 해체하고, 대안으로 조소앙이 제안한 평화의 관점으로 성장의 개념을 재정립하자고 주문한다. 그는 “평화의 관점으로 보면 정의의 폭은 더 넓어질 수 있다. 절대적 빈곤 해소 등 GDP로 표현될 수 있는 지표와 더불어 상대적 불평등의 해소, 인권 감수성의 신장 등까지 ‘잘 사는 것’의 가치 판단을 가능케 한다”며 “한국 사회도 이제 성장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지근대화론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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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향한 근대주의 해체
정태헌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발행ㆍ1만원ㆍ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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