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의 레토릭 걷어내면 비핵화ㆍ보상 방법론 이견 여전
급물살을 탈 것 같던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의 재개 준비 진척이 양측의 막판 신경전 탓에 더뎌지는 양상이다. 침묵을 깨고 북한이 협상 의향을 밝히자 “새 방법이 좋겠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화답하면서 최근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레토릭(수사)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외교가 중론이다. 지금껏 드러난 북미 간 입장 차이가 현격한 데다 협상의 실질인 내용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 쪽도 아직 없다.
자세만 놓고 보면 요즘 북미는 전향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초강경파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경질한 뒤 ‘선(先)비핵화, 후(後)보상’이 뼈대인 리비아 모델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새 방법론’을 거론한 건 누가 봐도 재회의 전조였다.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국에 가져오라고 요구한 ‘새로운 계산법’을 의식한 언행으로 읽혔다.
얼핏 보면 양측의 비핵화ㆍ보상 교환 방법론은 처음보다 서로 상당히 접근한 듯하다. 미 정부가 지난해 싱가포르 약속을 ‘동시 병행적으로’(simultaneously and in parallel) 추구할 준비가 됐다고 공식화한 건 이미 하노이 회담 직전인 1월 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통해서였다. 북한의 방법론인 ‘동시ㆍ단계적’(simultaneously and phased) 접근 방식과 외형상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착시일 공산이 크다. 공통으로 쓰인 ‘simultaneously’라는 영어 표현은 ‘동시에’와 ‘일제히’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북한이 전자를 취했다면 미국이 염두에 둔 건 후자다. 북한 얘기는 비핵화ㆍ반대급부를 선후 없이 ‘동시’ 교환하는 게 원칙인데 그 합의와 이행을 몇 단계에 걸쳐 반복하자는 것이다. ‘부분 합의, 단계 이행’이다. 하지만 미국이 선호하는 합의의 규모와 이행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비핵화의 범위ㆍ로드맵과 관련한 포괄적 합의가 우선이고 이렇게 싱가포르 공동성명 제3항인 ‘비핵화’ 합의가 도출되면 반대급부 성격인 ‘관계 개선’(1항) 및 ‘평화 구축’(2항)까지 3개 트랙 합의를 ‘한꺼번에’ 나란히 이행하자는 게 미국 얘기다. ‘일괄 합의, 병렬 이행’으로 요약된다.
이런 방법론상 이견은 70년 가까운 적대 기간 탓에 현재 제로(0) 상태인 신뢰 문제에서 비롯됐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29일 “비핵화 정의와 로드맵을 포함한 ‘큰 그림’부터 그려야 한다는 데 동의해야 북한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입장인 반면, 적대국에 공격 표적을 제공할 게 분명한 전체 핵 시설 신고는 신뢰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고 큰 그림 차원의 로드맵 작성의 유보 역시 불가피하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외교가에서 제안되는 절충안들은 비슷하다. 맨 처음 주고받는 비핵화ㆍ보상 조치를 확 키워 포괄적 합의에 가깝게 만들되 신고나 사찰 시기ㆍ방법에는 유연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입구는 영변을 포함한 모든 핵 시설 가동의 중단이다. 로버트 아인혼 전 미 국무부 비확산ㆍ군축 담당 특보는 최근 통일연구원 주최 학술회의에서 “현재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비핵화 정의 합의는 일단 미루고 핵 동결 수준의 단기 목표에 우선 집중하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 명시되도록 ‘잠정 합의’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제재는 영변 핵 시설 폐기가 어느 정도 진전된 시점에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경제협력 예외 적용 식으로 완화하고 추후 유엔 제재의 부분ㆍ단계적 완화를 모색하는 방식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