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출발한 우주탐사선이 외계인과 조우한다. 놀랍게도 그 외계인은 텅 빈 우주 공간에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떠 있었다. 인류보다 월등한 신체적 능력과 지식을 지닌 외계인은 탐사선에 들어온 뒤 무시무시한 사냥을 시작하고, 위기에 몰린 인간들은 필사적으로 대응책을 궁리한다. 그때 한 고고학자가 나서서 그 외계인의 고향 문명의 성격을 추론해낸다. 개체로서는 인간보다 월등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문명의 붕괴를 겪은 뒤 지금은 ‘초기 농민기’의 단계라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일보다 종족의 번식을 최우선 할 것이라 예상하여 그에 따른 함정 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물리치게 된다. A. E. 밴보트라는 SF작가가 1950년에 발표한 소설 ‘스페이스 비글의 항해’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래 전에 읽은 이 작품이 요즘 새삼 되새겨지는 이유는, 우리의 세계가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변화에 의해 문명사적으로 어떤 방향성을 보일지 사뭇 궁금하기 때문이다. 위 소설 속 고고학자는 문명이 생물처럼 단계를 밟는 주기를 보인다고 말한다. 처음에 땅에서 시작하는 토착 농민기를 거쳐 시장과 도시, 국가로 발전하여 거대 도시기를 맞고, 결국은 파괴적인 전쟁과 문명의 붕괴를 거친 뒤 다시 초기 농민기로 돌아가 새로운 주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각 단계를 지배하는 문화적 본능에 따라 움직이므로 행동 양태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위 이야기의 외계인이 만약 거대 도시기였다면 지적 합리성이 최고조에 도달해 있으므로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겠지만, 사멸한 문명의 생존자로서 무엇보다도 번식이 급했기에 그 본능을 역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적 역사관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임을 작가는 작중에서 밝혔다. 슈펭글러는 역저 ‘서구의 몰락’으로 유명한 독일의 역사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문화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성장과 성숙, 쇠퇴, 소멸의 역사적 주기를 반복하며, 거대 도시기 단계가 지속되면 시대의 영혼은 문명이라는 외피에 소모되고 고갈되어 자기파괴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으로 지금 시대를 보면 어떤 진단이 가능할까? 정보통신 분야를 필두로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수용 양상은 시대의 영혼이 문명이라는 껍질에 종속되어 빈곤해져 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정보단말기 중독, 계층 갈등, 정치와 경제 등 여러 층위의 제국주의, 도시 집중화, 전통적 가치들의 쇠락, 실질 가치가 아닌 추상 가치들의 우세 등등은 슈펭글러가 언급한 문화 쇠퇴기 증상의 21세기적 발현들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특히 20세기 이전까지의 인류사에서 명멸했던 세계 각지의 거대 도시기 문명들은 상대적으로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아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했지만, 지금 같은 고도 과학기술 가속 발달의 시대에도 과연 기회가 다시 주어질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한번 파괴적인 경로로 접어들면 현대 과학기술의 위력 때문에 그만큼 타격이 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로 그 과학기술에 힘입어 거대 도시기의 기나긴 지속을 낙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로 진출하는 것도 가능하고, 설사 몇몇 문화들이 파괴적 위기와 퇴보를 겪더라도 빠른 복구와 새 시작이 수월할 수도 있다. 역시 관건은 우리가 과학기술이라는 문명에 영혼이 얼마나 휘둘리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슈펭글러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10년 뒤면 독일 제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히틀러의 제3 제국이 몰락한 것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45년이었다. 만약 그가 지금 시대에 있었다면, 세계 각국의 문화 단계에 대해 어떤 진단을 내렸을지 궁금하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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