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는 ‘화성’ 용의자 과거행적]
1987년 6차 직후 강간 혐의 조사… 그 후 두 번 화성 수사선상 올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이춘재(56)의 과거 행적이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도중에도 강간, 강도 사건 용의자로 수사받기도 했다. .
경기남부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는 26일 당시 수사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이춘재에 대한 경찰 수사가 세 차례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은 이춘재를 불러다 직접 대면조사까지 했고, 다른 사건이긴 하지만 이춘재는 수사기관에 붙잡혀 심지어 재판까지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5월2일 화성 6차 사건, 1988년 9월7일 화성 7차 사건이 발생했을 무렵의 일이었지만, 경찰은 이춘재를 화성사건과 연결 짓지 못했다.
수사본부에 따르면 1987년 7월 경찰은 이춘재가 1년 전인 1986년 8월 발생한 강간사건의 용의자라는 제보를 받았다. 당시는 화성 6차 사건 발생 직후라 경찰은 이춘재의 학교, 직장, 이웃 등을 상대로 이춘재의 행적을 조사했다. 이어 이춘재를 불러다 직접 조사까지 했다.
그 결과 ‘이춘재가 화성사건의 유력 용의자’라는 보고가 지휘부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강간사건은 물론, 화성사건과의 연관성도 현장 증거물 부족 등의 이유로 빠져나갔다. 이후 화성사건이 계속 이어지자 경찰은 1988년말 이춘재를 다시 수사선상에 올렸다. 1990년 초 이춘재는 다시 한번 수사선상에 올라갔지만, 두 번 다 딱히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됐다.
그 와중에 이춘재는 1989년 강도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에 대한 수원지법 판결문을 보면, 이춘재는 그 해 9월26일 새벽 면장갑을 끼고 흉기를 든 채 수원의 A씨 집에 침입해 서성대다 집주인 신고로 붙잡혔다. 금품을 노리고 A씨를 뒤쫓아간 강도예비 등 혐의로 1990년 2월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춘재는 “낯 모르는 사람에게 맞은 뒤 그 사람을 뒤쫓다 A씨 집에 들어갔을 뿐”이라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줬다.
그 뒤 이춘재가 경찰 수사선상에 다시 오르는 일이 없어졌다. 1990년 11월15일 발생한 화성 9차 사건에서 용의자의 정액으로 보이는 흔적을 피해자 옷에서 찾아냈고, 감식 결과 혈액형이 B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반기수 수사본부장(경기남부경찰청 2부장)은 “처음 나온 혈액형 증거라 형사들 사이에 ‘용의자는 혈액형이 B형이다’라는 인식이 확산된 상황에서 수사가 진행됐다”며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경찰관들 진술로도 확인된다”고 말했다. 1991년 4월3일 화성 10차 사건 때 ‘B 또는 O형’이란 감식 결과가 나오자 9차사건과 겹치는 B형에 더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이렇게 경찰 수사를 피한 이춘재는 결국 1994년 1월 충북 청주시에서 처제를 성폭행, 살해한 뒤에야 구속됐다.
경찰도 당시 이춘재에 대한 경찰 수사가 미흡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 반 본부장은 과거 이춘재에 대한 수사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지금 우리로서는 당시 작성된 수사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기록에 적혀 있는 것 이외의 말을 하긴 어렵다”며 “우리도 답답하다”고 했다.
한편, 이춘재는 이날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접견 조사를 받았지만 여전히 화성사건은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춘재의 입을 열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했다. 프로파일러 투임을 9명으로 늘렸고 사건 목격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법최면 전문가 2명도 합류시켰다. 반 본부장은 “화성뿐 아니라 수원, 청주 등 인근 지역 유사사건에 대해 원점에서부터 들여다보고 있다”며 “모든 역량을 투입해 전방위적으로 의혹을 규명할 것”이라 말했다.
수원=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수원=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