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30만 마리 추정… 방역 실패로 바이러스 퍼지면 재발 확률 높아
폴란드ㆍ헝가리 등 2007년 큰 피해… 현재까지도 수천 건 발생 장기화
‘폐사율 100%’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 농장이 연일 늘어나면서 야생 멧돼지가 돼지열병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멧돼지가 일단 바이러스 숙주가 되면 30만마리에 달하는 국내 멧돼지를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중점관리지역 내 멧돼지에 대한 방역 작업이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가운데, 감염원이 된 멧돼지가 전국에 산재하며 돼지열병이 토착화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25일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따르면 멧돼지가 돼지열병 바이러스에 감염될 경우 돼지열병은 ‘유행병’ 단계를 거쳐 ‘풍토병’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처음에는 멧돼지들이 돼지열병을 빠르게 전파하지만(유행병 단계) 그만큼 폐사하는 숫자도 늘어나 확산속도는 점차 느려진다. 하지만 돼지열병 바이러스의 생존기간이 워낙 길고 바이러스를 보유한 멧돼지가 다른 개체와 접촉해 전염시키거나 폐사한 멧돼지를 통해 새로운 감염이 일어나기 쉽다 보니, 발병 지역에선 지속적으로 돼지열병이 재발할 확률이 높아진다.(풍토병 단계) 물론 활동범위가 넓고 번식력도 좋은 멧돼지를 상대로 대대적인 살처분이나 이동중지 조치와 같은 방역조치를 취하기란 불가능하다.
실제 최근 몇 년 간 돼지열병이 이어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은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조지아를 통해 동유럽에 들어온 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불가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발병 사태가 10년 넘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멧돼지가 주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들 국가에선 지난해와 올해에도 수천 건의 돼지열병이 발생했고, 헝가리는 지난달에도 야생 멧돼지 한 마리가 돼지열병으로 폐사했다고 OIE에 보고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멧돼지가 돼지열병에 감염된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현재 확산 추세와 국내 멧돼지 규모를 봤을 때 시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에 따르면 산림지역 1㎢당 마리수를 뜻하는 서식밀도는 2010년 3.5마리로 최저점을 찍은 뒤 2012년 3.8마리, 2014년 4.3마리, 2016년 4.9마리, 지난해 5.2마리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국에 있는 야생 멧돼지는 약 30만 마리로 추정된다.
국내 멧돼지가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발병 시점으로부터 1주일 전에 태풍 ‘링링’이 왔었다는 점을 볼 때, 북한에서 돼지열병 바이러스를 포함한 오염물과 배설물이 태풍을 타고 경기 북부 지역으로 넘어왔을 수 있다”며 “오염물에 있던 바이러스를 야생 멧돼지나 인간 등이 사육돼지로 전파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두 번째로 확진 판정을 받은 농장이 있는 경기 연천군은 멧돼지가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돼지열병 확진 판정이 난 뒤 정부는 주요 발생 지역에서 멧돼지에 대한 바이러스 검사를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못한 상태다. 환경부가 멧돼지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중점관리지역 내 9개 시군(강화 김포 파주 고양 양주 동두천 연천 포천 철원)에 포획틀을 추가로 설치했지만 아직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바이러스 확산 우려로 해당 지역에서는 총기 포획을 금지해 아직 잡힌 멧돼지가 없다”며 “총기 포획이 가능한 지역에서 실시된 멧돼지 정밀검사에선 아직 양성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세종=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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