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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거울 속 나라

입력
2019.09.26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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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북한이 1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하에 초대형 방사포 시험 사격을 다시 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 위원장과 간부들의 현지 지도 모습. 연합뉴스
북한이 1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하에 초대형 방사포 시험 사격을 다시 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11일 보도했다. 사진은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 위원장과 간부들의 현지 지도 모습. 연합뉴스

터키 태생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1988)은 화법(畫法)을 통해 중세 이슬람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 소개된 16세기 말 이스탄불 세밀화는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예컨대 모든 디테일이 살아 있다. 바위나 풀 한 포기마저 섬세하다. 원근이나 명암 따위는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신(神)의 시각이 구현돼 있기 때문이다. 부재(不在)한 이념이 체감되는 현실을 압도한 시기가 중세였다.

지금 통용되는 보편 기준ㆍ가치로 당시를 보면 기이한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지각(知覺)이 부정된다. 한 피사체의 정면과 측면을 공존시키는 묘사 관행이 전형적이다. 신의 눈이 굳이 인간처럼 하나일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낳은 결과다. 더불어 모든 표현에 계급성이 녹아 있었다. 지배자나 상위 계급은 중앙에 크게, 피지배층이나 하위 계급은 주변에 작게 그리는 게 동서양을 막론한 중세까지 원칙이었다.

북한은 박물관 같은 나라다(우리 헌법은 아니지만 유엔은 나라로 인정한다). 2017년 올해의 단어(미국 온라인 사전 메리엄 웹스터가 매년 선정) 영예를 놓고 ‘페미니즘’과 경합했던 ‘도터드(dotard)’는 북한이 발굴해 낸 중세 영어다. 그 해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욕하면서 쓴 표현 ‘늙다리 미치광이’를 북한은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애용했다는 저 고풍스러운 단어로 옮겼다.

실제 북한이 중세 봉건 사회와 흡사하다는 체계적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해 번역돼 국내에 출간된 ‘북한, 비정상의 정상국가’(2000)는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 소속 연구원인 오공단과 사회심리학자 랄프 해식이 북한판(版)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을 분석해 펴낸 책이다. 책은 21세기 초입의 북한을 김일성 주석 구상대로 “가부장에 의해 감시되는 유교적 왕국과 20세기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의 조합으로 이뤄진 나라”로 규정한다. 인민들이 엄격한 위계 질서를 수용하게끔 만드는 게 유교적 전통의 힘이다.

이런 시대착오의 배경이자 퇴행과 전도(轉倒)를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은 폐쇄 및 이념화라는 게 두 저자의 분석이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제목 ‘거울 나라의 앨리스’(1871)에서 착안한 저 책의 원제 ‘거울 나라의 북한’(North Korea Through the Looking Glass)이 드러내는 핵심 주제는 ‘분리된 현실’이다. 거울을 통해 앨리스가 들어간 반대편은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거울 나라는 결과가 원인을 앞서고 반대로 가야 원하는 곳에 도착하는 역전과 비논리의 시공간이다.

이런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기제가 이념이다. 거울은 내ㆍ외부 차단 장치이면서 환영(幻影)을 만들어내는 구실도 한다.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방을 상상해 보라. 북한이 그렇다는 게 저자들의 간파다. “이념은 경제를 파괴하고 국가를 고립시켰지만 김일성 주석 일가의 리더십을 미화하고 경제적 성공의 영적 대체물 역할을 함으로써 김씨 일가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북한이 ‘사상의 강국’을 자처하는 것도 나르시시즘(자기애)을 불러일으키는 거울의 효과다.

다시 협상의 계절이다. 중단됐던 북미 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조짐이다. 북한을 악마화하는 근본주의는 결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북한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 건 사실상 무망한 일이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거울 속 상대도 웃고, 내가 주먹을 들면 상대도 주먹을 든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학자 때인 지난해 초 저서 ‘70년의 대화’를 통해 한 말이다. 북한의 수동성을 헤아려야 한다. 그들의 시위를 전부 도발로 낙인 찍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김 위원장은 자기 시대를 열고 싶어한다. 북한의 중세가 끝나간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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