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유로존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ECB가 현대화폐이론(MMT)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MMT는 경기 침체기엔 정부가 돈을 적극 풀어 고용을 늘려야 하고, 이 과정에 재원(세수)이 부족하다면 화폐를 발행하라는 이론이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QEㆍ채권 매입을 통한 자금 공급) 등 비정통적 방법을 동원해 경기를 부양하면서도 MMT에 대해서만큼은 비판적 입장을 고수해온 상황에서 ECB 총재가 전향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다.
24일 금융권과 외신에 따르면 전날 유럽의회에 출석한 드라기 총재는 MMT를 언급하며 “실제 실험된 적은 없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새로운 생각”이라며 “ECB에서 논의된 적은 없지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드라기는 MMT와 더불어 “정부가 공공과 민간에서 돈을 사용할 이들에게 직접 쓸 돈을 쥐어줘야 한다”는 스탠리 피셔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 부의장의 최근 주장 역시 ‘새로운 생각’으로 언급했다.
드라기가 다음달 퇴임을 앞두고 있어 상대적으로 발언이 자유롭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이날 발언은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의 입장과는 궤를 달리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 구로다 하루히코(黒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차기 ECB 총재 취임을 앞둔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등은 한결같이 MMT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다만 드라기는 MMT 도입은 중앙은행보단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일이란 입장을 밝혔다. 실제 MMT는 이론적으로 정부가 침체기에 재정 균형에 구애받지 않고 지출을 적극 늘리기 위한 방책이므로 통화정책이라기보단 재정정책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드라기는 “돈을 분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정 업무이고, 이는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시장에선 ECB가 재차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선회한 상황에서 드라기가 유로존 회원국, 특히 독일을 비롯한 재정건전국을 향해 재정 확대로 보조를 맞출 것을 촉구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ECB는 지난 12일 통화정책회의에서 예금금리를 -0.4%에서 -0.5%로 인하하고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재개한 바 있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로존 경제 비관론이 심화하자 이에 맞설 부양책을 본격화한 것으로, 드라기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독일ㆍ네덜란드 등을 겨냥해 “정부 재정지출을 적극 늘려야만 마이너스 영역으로 떨어진 금리를 다시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로존 경기 전망은 여전히 악화일로다. 지난 22일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이 발표한 독일의 종합(제조업+서비스업) 구매관리자지수(PMI) 예비치는 49.1로, 경기 수축 전망이 확장을 앞서는 영역인 ’50 이하’로 진입했다. 미중 무역분쟁 등으로 발생한 제조업 부진 여파가 서비스업까지 번진 형국이다. 국제 채권투자회사 핌코의 앤드류 보섬워스 독일 자산운용 담당 대표는 “ECB의 새로운 양적완화가 소비자물가를 끌어올릴지 알 수 없다”며 “(마이너스 상황인)독일 국채수익률도 당분간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독일 10년물 국채금리와 연동한 파생결합펀드(DLF)에 투자했다 손실을 보고 있는 우리나라 투자자들에겐 부정적인 소식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