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국도로공사 이야기를 쓴다. 그 사이 큰 변화가 있었다. 대법원이 한국도로공사가 수납원들의 사용자라는 점을 인정했다. 풀어 말하자면, 한국도로공사는 한국도로공사서비스 같은 자회사를 만들든 만들지 않든, 그 자회사를 어디에 쓰든 원래 일하던 수납원들을 한국도로공사의 정직원으로 채용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도로공사는 여전히 직접고용을 거부하고 있다. 수납원들은 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본사 건물에는 “너무 힘들어요! 동료가 될 우리! 농성은 이제 그만!”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동료가 되기 위한 첫 단계인 직접고용은 할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자신들도 힘드니 농성을 그만 하라는 것이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몇 년 동안 법적 다툼을 해 온 근로자들, 대법원에서 승소하고서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수납원들, 정규직과 경찰들이 의료진 출입도 방해하는 상황에 고립된 농성자들 앞에서 ‘너무 힘들다’니 염치도 없다.
이 당당한 몰염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국도로공사는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이고 국가기간산업의 한 축을 맡고 있다. 법원 판결을 준수하여 지금까지 일해 온 수납원 천 몇백 명을 직접고용한들 망하지 않는다. 간접고용한다고 인건비가 0원인 것도 아니다. 사기업들도 변칙적으로 채용했던 비정규직을 직접고용한다고 딱히 망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공기업인 한국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을 따르더라도 파산할 만큼의 경영상 치명적 손해를 입을 위험은 낮은 반면, 사법부의 종국적 판단을 따를 의무는 높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직접고용을 하지 않을까? 대법원이 판결한 대로 따르는 것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공기업이 수십 층 높이의 현수막까지 걸어가며 ‘힘들다’고 징징거릴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여기에는 손익이나 당부를 넘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쟁점에 대한 이념적 저항이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더 이상 고용 형태에 따른 중립적 구분이 아니다. 계급이다.
본래 전속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당연히 정규직이다. 여기에 시장의 필요 등 때문에 예외적이었던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입법되고, 시간제 노동자(아르바이트)나 전문직 노동자뿐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채용되기 시작했다. 처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소년이나 청년 노동자, 경력단절 후 재진입하는 여성 노동자, 생계를 위해 고령에 다른 노동을 다시 시작한 고령 노동자 등은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한다. 정규직이었던 사람들이 한국도로공사의 예처럼 자회사 분리, 파견이나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660만명에 달한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33%다. 비정규직은 더 이상 ‘정규직이 아닌 고용 형태’라는 중립적 개념이 아니다. 정규직보다 적게 일하는 대신 고용유연성을 선호한 사람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70%에 불과한 한국에서, 비정규직을 노동자의 이상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 말하기는 어렵다.
현실에서 비정규직은 더 적은 임금을 받고, 더 긴 시간 일하고, 더 열악한 환경에서 더 험한 일을 맡는 사람을 뜻한다. 경조사비를 못 받는 사람, 파견처에 어떻게든 빨리 적응해야 하는 사람, 급여가 딱 최저임금 인상분만큼만 높아질 사람,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비정규직은 이제 정규직의 작고 좁은 문을 통과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어떤 계급이 되었다. 한국도로공사의 저 ‘동료가 될 우리’라는 괴물 같은 현수막과 그 아래를 가득 메운 경찰과 정규직 구사대가 보여 주듯, 비정규직은 이제, 계급이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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