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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만에 버지니아 울프 전집 완간… “페미니스트보다 위대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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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만에 버지니아 울프 전집 완간… “페미니스트보다 위대한 소설가”

입력
2019.09.24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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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주도 박희진 서울대 명예교수 

박희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자신이 번역한 울프의 ‘파도’를 들어 보이고 있다. ‘파도’는 난해하기로 소문나 한국에서도 제대로 번역한 학자가 드물다. 박형기 인턴기자
박희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자신이 번역한 울프의 ‘파도’를 들어 보이고 있다. ‘파도’는 난해하기로 소문나 한국에서도 제대로 번역한 학자가 드물다. 박형기 인턴기자

20세기 영국 모더니즘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오늘날까지도 페미니즘 작가를 나열할 때 맨 앞에서 호명된다. 그러나 정작 소설가로서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특유의 실험적 스타일 덕에 정복이 어려운 산으로 여겨져 왔다. 울프 사후 80년 가까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울프의 문학세계를 한데 아우르는 전집 출간은 국내에서 요원했다.

오랜 숙제로 여겨져 왔던 ‘버지니아 울프 전집’(솔출판사) 완간이 올해 드디어 이뤄졌다. 1991년 기획 이후 29년만이다.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울프의 대표 장편부터 ‘자기만의 방’ ‘3기니’ ‘울프 일기’ 등 산문까지 총 13권으로 묶었다. 울프가 살아 생전 남긴 모든 글을 그러모은 말 그대로 ‘전집’이다. 전집 완간의 주역은 무엇보다 솔출판사와 공동기획하고 번역을 도맡은 한국 버지니아울프 학회다. 학회를 탄생시킨 한국 버지니아울프 연구의 대모 박희진(83)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를 20일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만났다.

버지니아 울프. 한국일보 자료사진
버지니아 울프.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1년에 임우기 문학평론가 겸 솔출판사 대표가 저를 찾아왔어요. 당시 유럽을 여행하는데 그때 한창 유럽에서 울프가 페미니즘 작가로 유행하는 걸 보고 우리도 제대로 번역을 해야겠다 맘 먹은 거죠. 그때 저는 미국에서 울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서울대에서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수업을 하던 때라 번역을 긴 호흡으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일단 울프 연구서부터 냈죠. 그렇게 일을 벌이고 나니까 제자들이 학회가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고, 94년에 버지니아울프 학회를 꾸려서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박희진 교수가 완간된 울프 전집 중 울프의 산문 ‘자기만의 방’, ‘3기니’, ‘울프일기’가 엮인 책을 꺼내 보이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박희진 교수가 완간된 울프 전집 중 울프의 산문 ‘자기만의 방’, ‘3기니’, ‘울프일기’가 엮인 책을 꺼내 보이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완간까지 긴 세월이 걸린 만큼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는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게 학회 출범부터 지금까지도 후원을 해오고 있는 통 큰 기부자의 사연이다. “학회를 만들긴 했는데 현수막을 내걸 돈도 없어서 직접 후원자를 모집하고 다녔어요. 어느 날 누가 시내 어디서 만나자고 해요. 갔더니 딱 30분간 정부 욕을 하고, 계좌를 부르래요. 그 자리에서 전화로 1,000만원을 이체해줬어요.” 울프 전집의 이 숨은 공로자는 최재선 일곡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최 이사장은 이후에도 매년 울프 학회에 1,000만원씩을 후원했고 지금까지도 학회가 열릴 때마다 거금을 쾌척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회에도 참석한다. 박 교수는 “이런 분들이 진짜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분”이라며 거듭 칭찬했다.

박희진 교수가 20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박희진 교수가 20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자택에서 본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울프는 영국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대학 진학이 좌절됐다. 여성은 케임브리지대학 잔디밭에도 들어갈 수 없던 시대였다. 진학을 못한 울프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당대 지성인을 모두 모아 블룸즈버리 클럽을 결성했다. 박 교수 역시 서울대 최초의 여성 수석 졸업생이었고, 197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울프 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파도’ 등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울프의 대표작을 가장 탁월하게 번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그가 울프를 연구주제로 선택한 것은 운명같아 보이지만, 정작 박 교수는 “울프가 너무나 뛰어난 작가였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다.

“학사를 마치고, 피천득 선생(당시 서울대 영문과 교수)이 ‘한번 읽어보라’며 울프를 던져줬어요. 예술성이며, 작품세계며, 읽자마자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죠. (울프가 살던) 당시는 누구라도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어요. 누구나 분개할 상황인데, 너무 글을 잘 쓰다 보니 페미니스트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무엇보다 울프는 뼛속까지 완벽한 작가였어요. 울프를 ‘페미니즘 작가’ 혹은 ‘모더니즘 작가’로만 이해하는 건 울프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박희진 교수는 여든 셋이 된 지금까지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박 교수는 “제자들이 빨리 나를 추월해서 더 좋은 작품을 내길 바랐는데 아직까지도 없다”며 웃었다. 박형기 인턴기자
박희진 교수는 여든 셋이 된 지금까지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박 교수는 “제자들이 빨리 나를 추월해서 더 좋은 작품을 내길 바랐는데 아직까지도 없다”며 웃었다. 박형기 인턴기자

이번 전집의 목표는 단면적으로 이해돼 온 울프의 ‘문학적 정수’를 만나도록 하는 데 있다. 울프의 진정한 평가를 위해 학회는 다채로운 행사도 준비 중이다. 28일에는 한국영어영문학회와 공동주관으로 울프의 생애와 작품, 번역 및 영화를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심포지움을 개최한다. “언젠가는 꼭, 울프가 ‘여자 작가’가 아닌 ‘위대한 작가’ 그 자체로 평가 받을 날이 올 거라고 봅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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