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 헤프너(Hugh Hefner, 1926.4.9~2017.9.27)의 ‘플레이보이’ 창간 자본은 8,000달러였다. 대학을 나온 뒤 잡지 ‘에스콰이어’의 카피라이터로 1년 남짓 일한 게 돈벌이 이력의 전부이던 1953년 당시의 그는 무려 45명에게서 십시일반 저 돈을 모았다. 가장 큰 돈을 ‘쾌척’한 이는 1,000달러를 출자한 어머니였다. 헤프너는, ‘People’지에 따르면, 이 돈의 거의 대부분을 사진 한 장을 사들이는 데 썼다. 세계적인 섹스심벌 메릴린 먼로가 할리우드 데뷔 전인 49년 모델 시절에 찍은 누드 사진이었다. 53년 12월 ‘플레이보이’ 창간호는 5만부가 넘게 팔렸다.
가정(假定)은 무의미하지만, 만일 그가 800달러씩 주고 ‘고만고만한’ 사진 10장을 사들여 창간호에 썼다면, 플레이보이의 누드 제국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기획자이면서 승부사였다. 먼로의 사진은 그에게 창간호를 주목받게 할 한낱 콘텐츠가 아니라, 자기가 구상한 제국의 깃발이고 이념적 상징이었다. 8,000달러는 당시의 그가 스스로 매긴 신념의 값어치였다.
그의 생애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파란만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성의 해방자이자 수정헌법 1조(표현의 자유)의 전사라 여겼다. 실제로 성적 표현의 자유를 신장하는 데 기여했고, 여러모로 모순적이긴 하나 60~70년대 반 차별과 인권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다. ‘플레이보이’는 다른 출판물들이 싣기를 꺼리던, 동성애를 소재로 한 찰스 버몬트의 소설(The Crooked Man, 1955)을 과감하게 게재했고, ‘뿌리(1976)’를 출간하기 훨씬 전의 알렉스 헤일리를 인터뷰어로 채용해 ‘미국 나치당’을 창당한 신나치주의자 조지 링컨 록웰을 인터뷰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의 ‘플레이보이 제국’은, 70년대의 본격 포르노 잡지 ‘허슬러’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외설스러웠고, 군데군데 품위를 위해 애쓴 흔적이 있었다. 헤프너는 성을 상품화했고 고급 ‘포주’라는 혐의까지 있었지만, 그의 제국이 여성의 누드에만 의존한 건 아니었다.
알려진 바 그는 메릴린 먼로를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7만5,000달러를 주고 92년 사둔 LA 웨스트우드 빌리지 공원묘지 먼로의 옆 자리에 묻혔다. 내털리 우드와 파라 포셋, 트루먼 카포티, 자자 가보 등이 거기 함께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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