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漢陽都城)을 줄인 말 ‘한성’은 조선의 수도를 일컫지만, 사적 10호의 한양도성(1963년 지정)은 4대문을 이으며 그 한성을 둘러싼 방어벽, 즉 서울성곽이라고도 불리는 성벽을 지칭한다. 그 성벽이 1396년 9월 24일(음력) 완공됐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군사혁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일련의 조치들로 권력을 장악하고 4년 뒤 조선을 건국(1392년)했다. 고려 유신들이 껄끄러웠던 그는 1394년 10월 개경(개성) 대신 한양으로 도읍을 이전, 이듬해 9월까지 약 1년간 궁과 종묘, 사직 등 주요 전각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 뒤 좌ㆍ우승지에게 한양도성을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궁과 전각을 비롯, 성곽까지 모든 도시 설계ㆍ시행 책임자는 정도전이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1차 공사는 설을 쇤 직후인 1396년 1월 9일부터 모내기 전인 2월 28일까지 49일간, 함경ㆍ평안도에서부터 전라ᆞ경상도까지 8도 백성 11만 8,070명이 동원돼 진행됐다. 당시 한양 인구가 10만명이었다. 공사구간 총연장 18.627km(약 5만9,500척)는 97개 구간으로 나뉘어 지역별로 할당됐고, 구간별로 다시 6등분해 공사 책임자를 지정했다. 자연 암반을 활용한 구간도 있어 실제 공사가 진행된 곳은 5만8,200척이었다. 상대적으로 공사가 쉬운 구간도 있었지만 습한 저지대였던 동대문 구간처럼 어려운 구간도 많았다. 7월 폭우로 동대문 일부 축조 구간이 무너져 책임자가 처벌받기도 했다.
2차 공사에는 8월 6일부터 추수 직전인 9월 24일까지 7만9,400명이 동원됐다. 그 기간 중인 9월 13일 태조의 정부인 신덕왕후가 별세해 정릉에 묻혔고, 국장 기간 중 공사가 중단돼 인부들은 꿀 같은 휴식을 취했지만, 그만큼 완공도 귀향도 늦춰졌다. 공식 기록으로 도성이 완공된 게 저 2차 공사가 끝나던 날이었다. 하지만 남대문 문루가 완공된 건 1398년 2월이었고, 이후로도 보수ㆍ개축공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흙으로 쌓은 일부 구간을 모두 돌로 개축한 건 1422년 세종이었고, 왜란과 호란, 일제시대의 도로ㆍ철도공사, 6ㆍ25전쟁 등 전란이 있을 때마다 성의 일부가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졌다. 그사이 어느새 도시는 도성보다 높아졌고, 너머로 넓어졌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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