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다음달 우리나라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여부를 결정한다. 한국 경제의 위상을 감안할 때 국제사회의 특별 지원을 받는 개도국 지위를 ‘졸업’해야 한다는 국제적 압력을 감안한 것인데,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이어 경제정책 콘트롤타워인 홍남기 부총리도 지위 포기를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다. 개도국 지위 포기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농업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홍 부총리는 2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우리 경제의 위상이 크게 높아짐에 따라 다른 개도국들이 우리나라의 특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며 “개도국 특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지난 4일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가 “개도국 지위 포기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한 데 이어, 정부가 지위 포기로 가닥을 잡았다는 해석을 낳게 하는 발언이다. 홍 부총리는 다만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뜻인가’라는 취재진 질문에 “그런 뜻은 아니다”라며 “10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정부 방침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정부가 이날 처음으로 개도국 지위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논의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시한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개도국) 다수는 명백히 현재의 경제상황에 비춰 (현 지위가) 지탱될 수 없다”며 이 같은 나라 중 하나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WTO가 90일 내로 이 문제와 관련해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독자적으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를 잃어도 기존에 얻은 개도국 특혜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 여파가 크지 않을 거란 입장이다. 홍 부총리는 이날 “현재 WTO에서 논의되고 있는 개도국 특혜 이슈는 해당 국가들이 기존 협상을 통해 확보한 특혜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 WTO 협상에서 특혜를 적용 받을 수 있을지에 관한 사안”이라며 “우리의 경우에도 농산물 관세율이나 WTO 보조금 규모 등 기존 혜택에 당장 영향은 없다”고 했다. 농식품부 관계자 역시 “개도국 지위 포기로 인한 효과는 앞으로 진행될 무역 협상에서 생긴다”며 “협상이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개도국 지위를 잃은 뒤 WTO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농업계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지난 5월 내놓은 ‘최근 WTO 개도국 지위에 관한 논의 동향과 정책 시사점’에 따르면, 한국이 선진국 의무를 이행할 경우 쌀 관세는 현행 514%에서 154%로 대폭 낮아진다. 쌀을 선진국 민감품목으로 지정해 관세 감축 폭을 줄이면 393% 선에서 막을 수 있지만 대신 수입 쿼터를 늘려야 한다.
농민단체는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전국농민회총연맹ㆍ가톨릭농민회 등으로 꾸려진 ‘농민의 길’과 전국배추생산자협회, 전국양파생산자협회 등은 이날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은 통상주권을 포기하고, 농업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라고 지적했다.
세종=손영하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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