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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더 정치적이어야 한다

입력
2019.09.19 16:40
수정
2019.09.19 23:2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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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치 폭락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대가 평가절화된 자국 화폐로 도로에 임시 울타리를 만들어 놨다. AP 연합뉴스
화폐가치 폭락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대가 평가절화된 자국 화폐로 도로에 임시 울타리를 만들어 놨다. AP 연합뉴스

2008년 9월 전 세계에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정교한 이론과 예측 모형으로 무장한 경제학자도, 세상에서 가장 돈을 잘 알고 잘 번다는 월가의 금융인들도 눈앞의 절벽을 보지 못했다. 그해 11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제학 연구기관인 런던정치경제대학 증축공사 준공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도열해 있는 일류 경제학자들에게 물었다. “왜 위기가 닥치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거죠.”

9개월이 지나서야 영국학사원 회장단이 내놓은 답은 허탈했다. “영국과 전 세계 수많은 똑똑한 사람이 집단적 상상력을 발휘해 시스템 전반에 내재한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책임 회피성 발언이었지만, 진실은 그 안에 있었다. 경제를 지탱하는 근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었다.

영국의 금융인 펠릭스 마틴은 그 답을 돈에서 찾았다. 마틴은 2013년에 펴낸 저서 ‘돈’에서 인류에 닥쳤던 숱한 경제 위기는 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지금껏 사람들은 돈을 물물교환을 대체하는 단순한 물건으로 여겨 왔다. 돈을 많이 모으는 게 최고의 가치였다. 그러나 이는 돈에 대한 철학이 부재한 단견(短見)이었다. 마틴은 책에서 돈은 사회적 기술이고, 돈의 핵심은 신용이라고 강조한다. 사회의 경제적 위험을 체계적으로 분배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시스템으로 돈을바라 봐야 한다는 얘기다.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세계은행과 유럽안정 이니셔티브 싱크탱크에서 근무한 마틴은 현재 런던시티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다.

마틴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태평양의 작은 섬 야프에서 시작된다. 있는 거라곤 코코넛, 물고기, 돼지, 해삼밖에 없는 지구 최고의 오지. 학자들은 이곳의 경제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물물교환의 거래로 이뤄질 것이라 봤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야프 섬엔 고도로 발달한 화폐 시스템이 있었다. ‘페이’라 불리는 돌 화폐였다. 지름이 3.6m에 이르는 단단하고 육중한 바퀴 모양의 커다란 돌은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돌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돌의 주인은 종종 바뀌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돌의 현 소유주인 누군가가 코코넛 소유주에게서 코코넛을 사고 싶어 한다고 치자. 그럼 돌의 소유주는 코코넛 소유주에게 돌의 소유권을 이전하고, 코코넛 소유주는 돌의 소유주에게 코코넛 10개를 주는 거다. 두 사람은 단순한 물물교환이 아닌 양도 가능한 신용을 거래한 것이다.

마틴은 야프 섬의 화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근원적 신용 거래 및 정산 시스템이었고, 페이는 이 시스템을 추적 기록하는 보존 수단으로 신용 거래를 나타내는 증거물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물물교환을 더 쉽게 하려고 화폐가 탄생했다”는 화폐의 기원을 뒤집는 가설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학에서 화폐의 원초적 의미는 잊혀져 갔다. 금과 은이 유일한 화폐로 등장하더니, 화폐 가치는 고정됐다. 화폐 기준은 군주와 이미 많은 돈을 확보한 기득권층이 정했다. 거래는 활발해졌지만,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부채도 넘쳐 났고 불평등과 불안은 싹 텄다. 그럼에도 화폐와 시장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방임주의는 지속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손실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며 위험을 불공정하게 배분하고 있지만 근본 구조에는 손도 대지 못하는 현실이다.

마틴은 미래의 화폐 시스템을 새로 설계하자고 제안한다. 화폐를 물리적 사물로만 이해하고, 화폐는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상수라는 기존 통념부터 전환해야 한다. 화폐는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다. 예측 불가능한 경제적 이익이나 손실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방법을 화폐로 정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서 화폐는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민주적 정치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화폐의 궁극적 목표는 정확성이나 안정성을 넘어, 사회의 정의와 번영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우리가 바라는 돈의 길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돈은 더 정치적이어야 한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펠릭스 마틴 지음ㆍ한상연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416쪽ㆍ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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