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깜짝 카드로 ‘조국투쟁’ 리더십 살려
추석밥상 ‘한국당 대안론’ 실종, 총선 적신호
계파청산ㆍ보수통합ㆍ개혁공천 등 과제 산적
엊그제 주요 신문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 앞에서 삭발하는 사진이 크게 실렸다. 우여곡절 많은 우리 헌정사에서도 제1 야당 대표가 삭발로 정권에 ‘항거’한 것은 처음이란다. 살면서 땅에 발을 디딜 일이 거의 없었을 황 대표가 돌연 정치 브랜드인 2대 8 가르마 머리를 포기하고 ‘아스팔트 투쟁’을 결행했으니 정치권과 여론의 반향이 클 법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헌정 유린과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법 유린을 경고하고 끝장 투쟁을 통첩한 삭발 이벤트는 그에게 순교의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 등 소속 의원들이 울컥하고 일부 지지자들은 울부짖기도 했으니 말이다.
반응은 신통찮았다. 누가 봐도 뜬금없었다. 이언주 의원 등에게 선수를 빼앗긴 데다, 몸뚱어리 하나밖에 갖지 못한 약자 고유의 투쟁 수단은 황 대표와 어울리지 않아서다. 꾸준한 1인 시위로 결기를 이어가던 황 대표가 삭발을 결심한 배경은 분명치 않다. 추석 후 첫 지도부 회의에서 결심을 통고한 것으로 미뤄 연휴 내내 “결연한 투쟁 의지가 없고 당 전체가 우왕좌왕한다”는 민심에 시달린 결과로 추측할 뿐이다. 보수 기독교 전도사로 남다른 ‘기도발’을 자랑해온 황 대표이니 ‘지금 여기’를 문 정부와 대적하는 아마겟돈으로 계시받은 느낌도 든다.
보수 언론마저 사진기사 정도로 처리해 자칫 희화화할 뻔했던 그의 삭발은 중진ㆍ측근의 릴레이 동참과 당원 및 지지자들의 촛불시위로 연결되면서 웰빙 리더십 논란을 일단 잠재운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검찰의 수사 강도가 거세지면서 사그라들던 투쟁 동력에 다시 탄력이 붙은 것도 사실이다. 200여개 대학 3,000여명의 교수들이 문 정부의 정의를 묻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대학가 반발이 이어지는 등 문 대통령과 조 장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는 것 등은 그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당의 삭발과 촛불이 당의 앞길을 밝혀 주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철 지난 투쟁 만능주의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정권의 폭주”(황 대표)를 일깨울 뿐, 멈출 수는 없다. 멈출 수 있는 힘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하는(載舟覆舟)’ 민심 혹은 표심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한국당 주변에서 내년 총선까지의 로드맵과 전략에 고심하는 흔적은 찾기 힘든다. 나 원내대표를 향한 ‘삭발 흥행’이 되레 화제다. 문 정부의 내로남불 도덕성이 추석 밥상을 흔들었을망정 한국당 대안론이 아예 실종된 것을 대변하듯, 추석 전후 여론조사에서 중도 무당층은 40% 가까이 늘어났으되 한국당 절대 지지층은 20% 장벽에 갇힌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국당의 현재 처지는 한마디로 일모도원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농성하는 꼴이다. 정권을 끝장내자면서도 심판과 투쟁에서 이기기 위한 궁리와 고민은 남의 일이다. 그 사이 민주당 등 여권은 ‘20년 집권론’ 깃발 아래 총선기획단을 발족하고 인재영입위를 가동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반면 조직과 자원에서 절대 열세인 한국당은 입으로만 총선 승리를 외칠 뿐, 집안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황 대표 취임 때부터 외쳤던 보수대통합은 목표와 방향을 모두 잃었고, 문 정권에 실망한 중도층이나 청년ㆍ여성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은 허울뿐이다.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만 하면 저절로 보수통합이 되는 줄 알지만, 바른미래당과 우리공화당에 보낸 러브콜은 ‘너나 잘해’라는 냉소로 돌아왔다.
패스트트랙을 달리는 연동제 선거법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하지만 계파 갈등 탓에 공천 문제에 입닫아온 웰빙 지도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다. 지금은 ‘조국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지역구 축소까지 걸린 그 사안이 당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황 대표의 진정한 아마겟돈은 7개월 앞 총선이다. 그는 문 대통령에게 “가짜 뉴스에 취해 혼자서 정신승리를 하겠다는 거냐”고 따졌다. 그 물음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삭발이든 단식이든, 진지전 혹은 이념전의 자강(自强) 위에 서야 한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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