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후 서울 성북구 안암로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 입시특혜 의혹 진상 규명 촉구 3차 촛불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평등한 기회는 죽었다는 근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가 김훈은 진보 인사로 언급되거나 스스로 그렇게 지칭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의 작품들도 사회 참여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다. 그런 그가 건설현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들(한해 270~300명)의 사건에 분노해 지난 5월 ‘아, 목숨이 낙엽처럼’이라는 기고문을 한 신문에 실었다. 그는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 고공에서 일을 하다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죽었다면, 한국 사회는 이 사태를 진작에 해결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고층에서 떨어지는 노동자들은 늘 돈 없고 힘없고 줄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3년째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기자회견을 열어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개정을 촉구했다. 그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평소에 산업안전이나 이런 쪽에 관심이 많으셨어요”라는 질문에 “평소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제가 생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써 그쪽으로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살다가 보면 어떤 문제를 자기가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어요”라고 답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썼던 그는 밥벌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있는 노동자들, 바로 노동 문제의 핵에 접근하게 된 것 같다. 김훈은 구체적 사안에서부터 출발한 귀납적 진보주의자가 아닌가 생각해봤다. 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수의 진보인사, 특히 주요 ‘586’ 인사들은 정치 세력이나 이념에서 출발한 연역적 진보주의자라고 해야 할까. 진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갈수록 이기심을 보이는 ‘기득 진보’는 주로 이에 속한 것 같다.

스스로 진보라고 믿는 100명이 있다고 치자. 불평등이 줄어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바란다. 하지만 모두 자기 자식만큼은 적극적으로 교육 특혜를 주고 싶고, 이미 중상류층이지만 자기 연봉은 많이 오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그들의 임금이 많이 오르면 비정규직 임금은 정체된다). 또 집값 안정의 당위는 지지하지만, 내 집값이 떨어지면 화가 나고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진보주의자 100명이 모인 공동체는 돌멩이처럼 단단한 ‘보수집단’이다.

그렇다면 이 보수적 자아들은 왜 진보처럼 보이고 싶고, 심지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위선에 대한 혐오로 똘똘 뭉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J.D. 샐린저)의 주인공은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묻는 동생의 질문에 “(변호사가 된다고 해도) 정말 사람의 생명을 살려주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는 소망에서 그랬는지 모른다 말야. 다시 말해서 재판이 끝나면 법정에서 신문 기자나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서 치사한 영화 장면처럼 칭찬을 받고 사람들이 등을 어루만져주고 하는 그런 으리으리한 변호사가 되겠다는 야망에서 한 것인지 모른단 말이야. 자기가 엉터리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야.” 이타(利他)는 자신의 명예, 즉 이기(利己)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다.

물론 범죄가 아닌 이상, 구조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쪽보다는 공정사회를 추구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는 양 위선을 떠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속여서 꿈을 꾸게 만드는 쪽이 위선자라고 해도, 속아서 꾸게 된 꿈 자체가 가짜인 것은 아니라고 위안한다.

다만 아연실색인 점은 진보 장식품을 탐내는 보수적 자아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짜 ‘진보의 가치’를 공격한다는 점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자녀 문제를 두고 “원래 돈이 있으면(권력이 있으면) 다들 자식을 그렇게 키우고 싶은 것 아니야”라는 옹호론이 그것이다. ‘비정규직들은 정규직들을 질투해서 시위하는 것 아니야’ ‘자기들이 좋은 집 살 수 없으니까 배 아파서 집값 잡으라고 하는 것 아니야’와 같은 말이다. ‘진보 가치’란 원래 허상이라고 주장하며 생각대로 행하고 싸워온 정신들을 조롱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스스로 진보가 아니라고 인정하고 건전한 보수 가치 구현에 몸담아 줬으면 좋겠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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