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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드리 햅번’ 진추하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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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드리 햅번’ 진추하는 누구?

입력
2019.09.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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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숱한 추억의 배경음악 ‘One Summer Night’

70년 대 청춘스타 진추하(63. 라이온 자선재단 주석) 씨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파빌리온에 있는 팍슨 백화점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70년 대 청춘스타 진추하(63. 라이온 자선재단 주석) 씨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파빌리온에 있는 팍슨 백화점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1970년대는 ‘소리의 시대’였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 최초의 FM방송’인 한국FM이 1971년 대구에서 전파를 쐈다. ‘음악의 새로운 세상’은 대구에서부터 열렸다. 새로 등장한 FM방송의 음질은 깨끗하고 선명했다. 방향을 심하게 타고 쉴 새 없이 잡음이 끼어들던 AM방송과는 비교 불가. 가청권이 대구와 대구 인근에 불과했지만 음원에 가까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청취자들은 환호했다. 라디오가 가장 강력한 음악 매체의 권좌에 올랐던 시대의 개막이었다.

맑고 깨끗한 FM방송을 타고 어느 날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맑고 깨끗한 음색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너무 고왔다. 당시의 음악 차트를 석권하던 올리비아 뉴튼 존이나 카펜터스와 같은 여성 싱어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진추하의 ‘원 서머 나이트(One Summer Night)’. 한 번을 듣고도 마음 녹아내린 사람들이 많았다. 노래의 인기를 타고 진추하 주연의 영화 ‘사랑의 스잔나’가 개봉했다. 상주 출신의 소설가 성석제는 당시 서울서 유학하다 고입 연합고사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 영화를 봤는데 진추하에 마냥 동화돼 죽음 장면에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스크린에서 한 번 보고도 마음에 새긴 사람들도 많았다.

70년대 국민 여동생

진추하는 1970년대 이미 소녀시대를 능가하는 아이돌 스타였다. ‘원 서머 나이트’와 ‘졸업의 눈물(Graduation Tears)’로 7080세대의 가슴을 설레게 한 홍콩의 월드스타 진추하(63). 그녀는 가수, 작곡가,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다양한 끼와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원조 국민 여동생이었다. 가수 겸 배우로서 인기의 절정에 있던 그녀는 1981년 24살의 나이로 결혼과 함께 7년간의 연예계 활동을 접고 은퇴를 선언했다.

동그란 눈에 예쁜 미소가 돋보였던 그녀도 어느덧 육십이 넘었다. 머리에는 희끗하게 서리가 내렸다. 그의 등장은 어디서나 주목을 받는다. 단순히 ‘왕년의 스타’였기 때문은 아니다. 연예계 은퇴 이후 장애인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나눔과 봉사를 통해 어느새 아시아 지역에서 희망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양의 오드리 햅번’이라는 별칭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자선 사업가이자 서예가, 문학인으로 활동하며 아시아 젊은이들의 롤 모델이 됐다.

2006년 진추하씨가 말레이시아 언론 매체와 인터뷰 후 찍은 사진.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2006년 진추하씨가 말레이시아 언론 매체와 인터뷰 후 찍은 사진.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소녀 진추하

진추하는 1957년 가난한 집안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방면에서 재주가 넘쳤던 그녀는 일찌감치 연예인의 꿈을 키웠다. 진추하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와 피아노 연주, 작곡 등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다. 1974년 홍콩 유행창작 가요제에 자신의 자작곡 ‘Dark Side of Your Mind’를 들고 참가해 최우수 가창상과 최우수작곡상을 수상하면서 천재옥녀(天才玉女)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76년 국산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한 한국 홍콩 합작영화 ‘사랑의 스잔나’에서 그녀는 주인공 역을 맡아 한국 팬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영화는 배경 곳곳에 한국 풍경이 등장해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수록곡인 ‘Graduation Tears’와 직접 작곡한 ‘One Summer Night’는 종진도(아비)와 함께 부른 듀엣곡이다. 당시 국내에서 센세이션에 가까운 인기몰이를 했다. 흥행은 1977년 ‘추하 내사랑’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7년간의 가수 활동과 5년간의 연기 활동을 통해 홍콩, 한국, 대만 등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고, 1977년에는 제14회 대만 금마장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이룬 분에 넘치는 성공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마상을 너무 일찍 받아서 여기저기서 영화 출연 제안이 들어왔지요. 내 능력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감독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연기하고, 고만고만한 러브 스토리 영화를 계속 찍으면 그만이었지요. 남자 배우에 반한 듯한 표정을 짓고 피아노 치며 노래 좀 부르다 보면 그냥 끝나는 영화들이었어요!”

그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화려하지만 무미건조한 삶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18살부터 24살까지 소녀 진추하가 연예계에 몸담으며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은 ‘성장이 없는 사람’이었다.

1976년 8월에 개봉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에서 진추하씨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모습.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1976년 8월에 개봉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에서 진추하씨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모습.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변신

그녀는 현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말레이시아 화교로서 철강, 유통, 부동산, 조경, 광산, 자동차, 타이어, 제지업 등 수많은 업체와 백화점, 부동산 등을 거느린 재벌 기업 팍슨의 종정삼(윌리엄 쳉) 회장과 1981년에 결혼을 했다.

팍슨은 동남아를 포함해서 100개 이상의 점포를 소유한 굴지의 그룹으로 진추하는 팍슨 그룹 산하 라이언 팍슨 파운데이션 기금회 주석이다. 기금회는 자선활동을 주로 한다. 그녀도 몇 개의 사업체를 맡아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결혼과 함께 음악과도 인연이 끝난 줄 알았다. 2006년 25년 만에 그녀는 새 앨범 ‘Fly Our Dreams’를 발표하며 다시 대중들에게 나타났다. 자선 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며 글솜씨를 선보이기도 했다.

진추하에게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2002년부터 서예를 시작했다. 연기에 대해 그녀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자면 80점,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해가는 것은 가장 요원한 꿈이었다. 서예는 제로(0)에서 시작했지만,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희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서예는 곧 도전이자 희망이었다. 현재 그녀의 서예 작품은 예술성을 인정받아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그녀가 가진 두 가지, 음악과 서예 모두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쓰이고 있다.

봉사하는 삶

진추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한 점의 촛불 불빛(一点烛光)’ 노래를 만들었다. 1981년 이 노래로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 노래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좋은 일들이 많아지기를 바라고 쓴 곡인데 재난 상황이 발생하고 모금 운동을 하면서 이 노래를 틉니다. 이 노래가 많이 들린다는 건 곧 도와야 할 사람들이 많다는 뜻도 되니 슬퍼요.”

그녀는 비행기가 갈 수 없는 오지에 사는 아이들에게 백내장 수술을 지원하는 생명의 특급기차를 후원했다. 신장, 윈난, 티베트까지도 직접 가서 의료진과 함께 아이들을 보살폈다. ‘고향의 룽옌 나무(家乡的龙眼树)’는 9개월간 온전히 아이들을 수술하는 의료진들을 위해 만든 노래로 장학우(장쉐요우), 유덕화(류더화), 알랜 탐, 성룡(청룽)이 진추하와 함께 앨범에 참여했다. 이 CD는 순식간에 1,000만 위안(17억 원)어치가 팔려 아이들에게 수술비를 보탤 수 있었다.

“저는 청결을 중요시하는데 중국 신장(新疆)에서 아픈 사람들을 보니 그런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었어요. 신장을 갔다 온 이후로 제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앞으로 능력과 의지를 봉사하는 데 쓰기로 했어요!”

진추하 씨의 대표곡인 원써머나이트가 수록된 앨범 재킷.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진추하 씨의 대표곡인 원써머나이트가 수록된 앨범 재킷. 라이온 자선재단 제공

한국과의 인연

진추하는 유독 한국과 인연이 깊다. 2015년에 팍슨 그룹은 제주산 상품의 중국 수출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제주산 생수·가공식품 등이 베이징·상하이 등 중국 주요도시 백화점에 입점 됐다. 비즈니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주도 주상절리를 화폭에 담았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소식을 듣고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한시를 짓기도 했다.

자신의 첫 작품을 탄생시켜준 한국과의 인연을 놓지 않기 위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년간 모월간지에 칼럼을 썼다. 그러던 중 2016년에 유방암 2기 판정을 받았다. 병마와 싸우는 중에도 칼럼은 이어졌다. 그녀는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병마조차도 봉사활동의 소재로 삼았다. 수술 후 암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강연에 나선 것이다. 그녀는 또한 투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올해는 대구에서 추진한 ‘천원의 기적’ 홍보대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21일 자선공연까지 기획했으나 태풍 소식에 어쩔 수 없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그러나 불씨는 살아있다. 진추하씨는 언제라도 다시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방문해 팬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자선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강은주기자 tracy11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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