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행정부 내 대표적인 강경파인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전격 경질했다. 사진은 지난 2018년 4월 18일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플로리다 팜비치의 마라라고 클럽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의에 배석한 모습. 포토아이

볼턴이 물러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내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했다. 비핵화의 모멘텀이 되살아나고 있다. 작년 9월 평양선언에 감격했다가 올 2월 하노이에서 실망했던 우리다. 이번엔 뭔가 일이 돼야 한다.

볼턴은 리비아 모델을 강조했다. 리비아는 초보적 핵 프로그램만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핵 프로그램 폐기를 결정한 2003년 12월 19일부터 핵물질 등의 반출과 검증까지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핵무기가 없었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볼턴이 등장하면서 북핵 폐기에 1년, 길어야 2년이면 족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일괄타결 방안이라고 했지만 그냥 항복하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리비아 모델 하면 2011년 카다피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떠오른다. 리비아라는 말만 들어도 북한이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북한이 이 정도라도 핵협상에 따라온 것은 그들이 핵개발의 딜레마를 처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만들게 되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정치적 위상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쭐함은 잠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게임을 벌일 수 있는 것은 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냥 회색이다. 대학에 가면 새 세상이 열리는 줄 알았는데 삶이 갑자기 장밋빛으로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핵 프로그램이 고도화되면서 경제제재가 제대로 작동됐다. 경제가 엉망이 되어갔다. 미중 경쟁이 심화되면서 중국이 북핵을 희생양으로 삼고 미국과 타협할 수도 있으리란 상상도 했을 것이다. 핵무기를 만들었지만 한국이 자신들의 핵 공갈에 쉽게 넘어 갈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핵무기는 억제에 효용이 크다. 적이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마술을 부릴 수 있다. 그러나 핵으로 상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봐도 핵의 강요 효과는 크지 않았다. 미국이 유일 핵 보유국이었을 때도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북한 지도부는 핵을 믿고 우리를 향한 국지도발을 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첨단 전력으로 무장한 우리 군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 뻔하다. 화가 나겠지만 국지분쟁을 빌미로 핵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감행하는 시나리오는 생각하기 싫을 것이다.

핵무기를 완성한 지금, 북한은 오히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런 딜레마를 감안하면 북한의 선택지는 하나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조건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조건이 형성된다면 자신의 핵무기를 녹슬어가게 내버려 둘 수 있다는 점을 내비치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핵을 폐기하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안 가본 길이기에 핵을 옆에 끼고 천천히 가고 싶은 거다.

북한 핵의 부식은 이러한 북한의 의도를 활용한 단계적 비핵화 논리다. 비핵화의 시계를 10년, 15년으로 잡는다면 우리는 북한 핵이 서서히 녹슬어 가도록 상황을 조성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오염된 핵시설을 폐기하고 정화하는 데 10~15년은 소요될 것이라 하지 않는가.

북핵 부식론은 인기가 없다. 쇠뿔을 단김에 빼듯 일괄타결만이 옳은 해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신뢰하지 못하는 양측이 어떻게 화끈하게 단번에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겠는가. 북핵 부식론에 의하면 우리는 북핵을 머리에 이고 어느 정도 기간을 살아내야 한다. 최선책은 아니라 차선은 된다. 군사적으로 보면 북한 핵무기 숫자를 현 상태에서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북핵 일부가 반출되면 그들의 안보 우려를 감안해 나머지는 일정 기간 갖고 있게 해준다. 우리는 그동안 전략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북한은 자신의 핵을 서서히 녹슬어 가게 할 것이다. 나쁘지 않다.

부형욱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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