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기술 한국] <하> 구멍 뚫린 산업 핵심기술
 파격 이직 조건에 핵심 인재ㆍ기술 넘어가… 10년 걸린 기술, 5개월 만에 추격 
산업기술 유출 사건 유형. 그래픽=강준구 기자

#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S공업은 자동차, 선박, 굴착기에 쓰이는 초경합금 제조 기업이다. 한때 450억원의 연매출을 자랑했지만, 얼마 전 산업기술 유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직 대표이사였던 A씨가 회사를 그만둔 뒤 일본의 경쟁 업체와 손잡고 2011년 동종 업체인 K사를 설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 기술이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초경합금 제작 공정은 텅스텐과 니켈, 코발트를 어떤 비율로 배합하는지가 핵심인데 이 배합노트를 A씨가 가져갔다“고 말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주방장이 비밀 레시피를 가져가 똑같은 식당을 차린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K사는 설립하자마자 연 매출 100억원을 올리며 승승장구한 반면 S공업은 매출이 반토막났다.

# 자동차 부품 검사장비 제작업체인 B사는 2014년 기술 유출로 위기를 맞았다. 기술영업이사 C씨가 중국에 있는 경쟁업체로 이직하겠다고 ‘통보’하면서부터였다. B사는 당시 독일, 미국, 일본의 몇 개 기업만 가진 독보적인 제조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B사만이 기술을 갖고 있었다. 회사는 C씨에게 기술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냈지만, 이직을 조건으로 수십 차례 핵심 기술 정보를 전달한 건 물론 민감한 자료가 담긴 외장하드를 통째로 빼돌린 뒤였다. B씨를 데려간 중국 회사는 B사가 10년 가까이 걸렸던 장비 제조를 단 5개월만에 성공했다.

최근 5년 산업기술 및 영업비밀 해외 유출 사건과 현황. 그래픽=강준구 기자

국내 제조업계의 기술 보안에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경제를 이끄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탄소섬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의 기술 유출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핵심 산업 기술 유출이 기업과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는 점을 정부나 업계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인력 빼내기나 퇴직자 데려가기 등 법망을 빠져나가는 교묘한 수법 때문에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은나노와이어 기술을 개발한 국내 한 중소기업은 2017년 기술 유출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은나노와이어는 폴더블(접히는) 스마트폰이나 롤러블(돌돌 말리는) TV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는 첨단 기술 분야 중 하나로 이 회사만 해도 5년 넘게 100억원 이상 투자해 얻어낸 기술이었다. 하지만 기술고문 겸 연구소장을 지낸 D씨가 재직 중 취득한 정보를 외장하드에 가득 담아 미국의 경쟁 기업에 빼돌리면서 회사는 지금도 그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D씨와 같은 ‘내부인’에 의한 기술유출 범죄 심각성을 호소한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지난해 내놓은 ‘국가핵심기술의 법적 보호와 주요 쟁점’ 보고서를 보면, 전체 조사 대상 기술 유출 사례 193건 중 전ㆍ현직 직원에 의한 유출이 146건에 달했다. 기술 유출 하면 떠오르는 ‘산업 스파이’가 아니라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이직을 조건으로, 혹은 막대한 보상금의 유혹을 받고 민감한 기술 정보를 빼내 주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회사나 기술력을 가진 회사의 직원을 타깃으로 하는 게 효율적이고 성공 확률도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해는 대부분 중견ㆍ중소기업 몫이 된다. 대기업과 달리 기술 유출 방지 시스템을 구축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급여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열악해 ‘거액의 돈’이나 ‘임원급 대우’ 등의 유혹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2013~2018년 경찰이 적발한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총 637건이었는데, 이 가운데 550건(86.3%)이 중소기업 피해 사건이었다. 반도체 제조업체 관계자는 “반도체 쪽만 해도 중국 업체들이 지금 받는 것보다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까지 임금을 올려주고 각종 주택자금이나 통신비까지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혹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문제는 유출 경로를 뻔히 알면서도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메일이나 이동식 저장장치가 외부로 나가는 채널을 봉쇄하거나, 주요 기술이 담긴 저장파일에 대한 접근권을 최소화하고, 퇴사 시 기밀유지 각서를 쓰게 하거나 이를 어겼을 때 징계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작심하고 빼돌리는데 CCTV를 100대 설치하면 뭐하겠냐”는 하소연이 나온다. 정부도 최근 국가핵심기술을 고의로 유출했을 경우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배상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까지 도입했지만 현장에선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기술유출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사안이 복잡해 1심 재판에만 짧게는 1년 이상 소요되고 3심까지 가면 6~7년 이상 허비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기업들에게는 부담이다. 피해 기업이 기술개발이나 상용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 오히려 기술 탈취 기업이 앞서나가는 ‘역전현상’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장항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기업은 보안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이고, 정부도 적절한 예산투입을 통해 기술 보호에 힘써야 한다”며 “이제는 기술 발전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 걸친 ‘안정적인 기술 보호’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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