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학창시절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대학 졸업 무렵 들은 교양강좌다. 뉴스를 통해 최신 시사를 정리해주는 2학점짜리 강의였는데, 3학년 과정이지만 취업 면접을 앞둔 나 같은 학생들이 대거 신청했고, 절박했기 때문에 학점 비중과 상관없이 대단히 학구적인 분위기를 종강까지 이어간, 그 시절 드문 수업이었다. 물론 강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첫 수업 시간 77대 3, 많아야 75대 5에 가까웠던 수강생의 좌우 이념 불균형이 종강 무렵 고스란히 뒤집어져 반 전체가 보수화됐다는 충격만 뇌리에 남을 뿐. 누가 봐도 이념 스펙트럼이 ‘우향우’였던, 그 독보적인 편향성으로 지금은 유튜브 스타가 된 강사는 매주 이슈별 토론을 이어가며 학생들의 ‘보수 의식화’에 성공했다.
더 충격적인 풍경은 종강 후 뒤풀이였다. 맥주를 마시는 두어 시간 내내 강사는 수업 때 못다 한 본인의 견해를 쏟아냈다. ‘시국을 논하는’ 수업시간의 그 모습이 뒤풀이에서까지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걸 보고 처음으로 ‘중년 가장의 고독이란 저런 모습인가’ 생각했다.
정치권이 추석 민심이라 일컫는, 명절에 모인 어르신들이 시국을 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날의 뒤풀이 장면을 떠올린다. 연장자 순으로 발언권이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콘텐츠 없음을 나라 걱정으로 돌파하는 가장들의 분투를. 그 거대한 고독을.
텅 빈 자기 서사의 자리를 나라 걱정으로 메우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남의 걱정으로 돌파하는 사람도 있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고 쓴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가 지난해 화제가 된 건 이런 공감대에서 비롯됐을 터다. 묻지도 않은 삼촌, 사촌, 육촌의 근황을 알려주며 그 아들 딸들의 입학과 취직, 결혼과 출산 소식 끝에 “네 결혼은 언제?”로 끝나는 긴 독백을 읊는 어르신이 집안에 반드시 있다. 남의 걱정이나 나라 걱정이나 명절에 돌림노래를 들을 때마다 대놓고 짜증을 냈던 나는 이제 어르신들의 (자기 자신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목소리’를 생각하며 짠해진다.
3개 사회적 기업이 합심해 만든 프로젝트 ‘우아한 미옥씨’는 50, 60대 여성이 자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용사, 사진작가의 도움을 받아 프로필 사진을 찍고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뷰 책자로 제작해주는 ‘메이크오버 풀세트’는 수십만원대 가격에도 지난달 8명 모집에 140여명이 몰렸고 이 평범한 이들의 인터뷰집을 사겠다는 이도 수백 명에 달했다.
이 서비스의 핵심은 인터뷰 질문이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30대들은 ‘어릴 적 꿈이 무엇이었나요?’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동세대 50대 여성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같은, 살면서 절대로 자기 부모에게는 묻지 않을 것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서비스를 신청한 ‘미옥씨’는 이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익힌다.
“당신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이 딸 낳았을 때라고, 딸이 나처럼 고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좋으면서도 걱정했다는 1호 미옥씨 대답 듣고 울컥했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말이다.”(박소영 세컨드투모로우 공동대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지켜본 기획자들은 하나 같이 그 대답을 통해 제 부모를 투사하게 됐다고, 다른 한편으로 그 세대의 삶이 그렇게 다양한지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서먹한 자리에서 진부한 레퍼토리처럼 나라 걱정 남의 걱정을 쏟아내는, 자기 자신을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분들에게 먼저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누구인가.’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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