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9월 23일 오전 10시, 한국 첫 유료 도로인 ‘강변 1로’가 개통됐다. 한강대교(당시 제1한강교) 남단에서 양화교까지 3.72km 구간. 차선 폭 3.5m의 4차선에 도로 중앙에 2m 폭의 숲을 조성했고, 국내 최초로 1.5m 높이 가드레일까지 갖춰 전체 도로 폭은 20m였다. 흙 80만톤과 자갈을 부어 도로 높이를 15m로 돋움으로써 한강 제방 기능도 하게 했다. 공사는 67년 3월 착공해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연 인원 12만여명이 동원됐고, 공사비 약 3억원이 쓰였다.
강변1로는 김포국제공항을 잇는 직행로였다. 또 양화로는 71년 성남 서울공항 개장 전까지 권력자들이 자주 이용하던 여의도공항의 입구였다. 여의도공항이 광장이 된 뒤로도 권력자들은 반공 궐기대회 같은 대중 동원 행사 연단에 서기 위해 그 도로를 이용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정일권 당시 총리가 30원짜리 통행권을 끊고 그 도로를 처음 달려 개통식에 참석했다. 통행권은 2륜차 10원, 승용차 20원, 버스 등 승합차 30원, 견인차 등 특수차량 100원이었고, 개통 첫날 약 10만 원어치 통행권이 팔렸다고 한다. 강변로는 물론, 경인선 철도와 함께 서울~인천, 서울~김포의 통행 물류에 크게 기여했다. 강변1로 개통으로 서울~김포의 경우 종전 노량진~영등포를 경유할 때보다 11분 30초 가량 이동 시간이 단축됐다.
당시 서울시장이 3년 뒤 ‘와우아파트’ 부실-붕괴 참사로 쫓겨난, 군 출신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었다. 그는 한강개발 1차 계획의 첫 사업으로 강변1로를 닦았다. 민간자본이 아닌 시 예산으로 벌인 공사였지만, 수혜자에게 직접 비용을 걷어 다른 행정사업에 쓰겠다는 게 그의 명분이었다. 서울 시내 자동차 대수가 2만대 남짓이던 때였다. 어쨌건 그 수입으로 김현옥은 이듬해 2월 북악스카이웨이 공사를 시작했다.
2년 뒤 강변4로(한강교 북단~양화교 북단)가, 70년 말 강변3로(한강맨션~성동교)가 잇달아 개통됐다. 강남ㆍ북 강변도로는 88년 올림픽에 맞춰 각각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로 개명됐다. 강변1로는 76년 무료 도로로 풀렸고, 이름도 노들길(87년)로 노들로(2010년)로 바뀌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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