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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영국인’ 윌리엄 조이스의 반역죄

입력
2019.09.1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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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도주하다 허벅지 총상을 입고 앰뷸런스에 실려 군 병원으로 호송되는 윌리엄 조이스. 영국 전쟁박물관 자료사진.
1945년 5월 도주하다 허벅지 총상을 입고 앰뷸런스에 실려 군 병원으로 호송되는 윌리엄 조이스. 영국 전쟁박물관 자료사진.

윌리엄 조이스(William Joyce, 1906~1946)는 미국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1940년 독일 시민권을 얻은 파시스트다. 그는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영어 선무 방송 ‘독일의 소명(German Calling)’을 진행하며 자신의 닉네임 ‘Lord How How(하하 경)’로 악명을 떨쳤다. 영국 법원은 45년 9월 19일 그에게 ‘대역죄(high treason)’로 사형을 선고했고, 이듬해 1월 영국의 마지막 반역죄 처형이 집행됐다.

그는 잉글랜드-아일랜드 혈통 이민자 아들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 골웨이로 다시 이주했다. 아일랜드에서 성장해 런던대 버크벡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파시즘에 빠져든 게 그 무렵이었다. 30년대 파시즘은 이탈리아-독일뿐 아니라 유럽과 북미에도 썩 많은 지지자가 있었다. 영국파시스트연합(BUF)이나 프랑스의 ‘불의 십자가(CF)’ 등이 대표적이었다. 조이스는 1932년 BUF에 가입했다.

1921년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10대이던 그는 영국군 우편물 배달부로 일하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의해 처형당할 뻔한 적이 있었고, 대학 시절 한 보수 정치인의 선거를 돕다가 공산주의자의 테러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조이스는 “유대인 빨갱이 짓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창한 언변과 탁월한 선동술로 이내 BUF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지만, 내부 권력 다툼과 노선 이견으로 37년 탈퇴, 더 극렬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며 ‘국가사회주의연맹(NSL)’을 설립했다. 2년 뒤 그는 거기서도 사실상 쫓겨나 독일로 이주했다. 그는 괴벨스 선전상 휘하의 방송국 영어권 아나운서로 채용됐고, 전쟁 발발 후 ‘진가’를 발휘했다. 나치 체제ㆍ이념 선전과 파죽의 전황 선전, 연합국 정치인 조롱…. 전시 제한된 정보 상황 하에서 유럽 시민과 전선의 군인들은 그의 방송을 열심히 찾아 듣곤 했다. 고정 청취자 600만명, 최대 1,800만명이 그의 방송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베를린 함락 직전인 45년 4월 30일 마지막 방송에서 그는 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소련의 위협을 경고한 뒤 “하일 히틀러, 그리고 안녕히”라는 인사로 방송을 맺었다. 그는 5월 28일 덴마크 국경서 체포됐다.

변호인단은 그가 독일 시민이라며 반역죄 불성립을 주장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38년 발급받은 영국 여권이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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