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하차노프(23ㆍ러시아)를 만났을 때 사실 엄청 긴장했어요. 톱10 선수니까요.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해보니까 ‘어? 해볼 만 한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2019년은 권순우(22ㆍCJ후원ㆍ당진시청ㆍ81위)에게 특별한 한 해다. 2부 투어 격인 챌린저 대회 생애 첫 우승을 시작으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본선 대망의 첫 승리를 올렸다. 이어 투어 첫 16강ㆍ8강 진출에 성공한 데 이어,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세계랭킹 100위권에 진입했다. 여기에 모든 테니스 선수들이 꿈꾸는 무대, 윔블던 본선을 밟았다. 1회전에서 패하긴 했지만 세계 9위 하차노프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한 세트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US오픈 본선 진출까지 포함하면 올 한 해 처음 경험해본 것만 7번째다. 모든 게 처음이라 부담이 될 법도 하지만 권순우는 그 과정을 통해 더 단단해졌다. 데이비스컵 일정을 마친 15일 중국 구이저우성 구이양의 한 호텔에서 본보와 만난 그는 “랭킹이 높은 선수랑 붙어도 소심해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승패를 떠나 이 잘난 선수들을 내가 얼마나 괴롭힐 수 있을지 실험해본다는 생각으로 나서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 자신감으로 이번 시즌 성장을 거듭한 권순우는 이제 1부 투어에 걸맞은 선수가 됐다. 챌린저에서 지난 2년간 꾸준히 경험을 쌓은 결과다. 스스로 꼽은 장점인 ‘경기 감각과 센스’를 바탕으로, 주무기인 빠른 발과 한 박자 빠른 라이징 샷을 활용해 공격적으로 경기를 풀어 나간다. 약점으로 꼽혀왔던 백핸드와 서브도 보완됐다. 올해 3월부터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임규태 코치와도 찰떡궁합이다.
성적은 자연스럽게 올랐다. 3월 일본 요코하마, 5월 서울 챌린저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했고, 7월 ATP 투어 멕시코 로스카보스 오픈 8강에 올랐다. 예선을 거쳐 메이저 대회인 윔블던과 US오픈 본선도 진출했다. 지난 1월 239위였던 랭킹은 벌써 81위까지 올랐다. 권순우는 “올해 목표가 100위였는데 예상보다 빨리 달성했다”며 “그래도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올라가고 싶다”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박용국 SPOTV 해설위원도 “권순우가 장신의 유럽 선수들을 상대하기 버거운 체격조건인 건 맞지만, 지능적이고 다양한 플레이를 익히고 있어 경쟁력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닮고 싶은 선수는 비슷한 스타일의 니시코리 케이(30ㆍ일본ㆍ8위)다. 실력도, 성격도 모두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 그가 밝힌 이유다. 권순우는 “니시코리는 자신만의 공격적인 스타일이 뚜렷하면서도, 상대에 맞춰 유연하게 플레이를 해나간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그와 한 번 연습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후로 먼저 인사를 하면서 챙겨줬다. 사려심 깊고 친절한 선수”라고 말했다.
좋은 성적 덕분에 이번 시즌에만 벌써 22개 대회 69경기의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지만 권순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올해처럼 시합을 많이 뛰어본 건 처음이라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며 “아직까지는 잦은 장거리 비행도 힘들고, 체력적으로 보완할 점이 남아있지만 김권웅 트레이너와 함께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체력이) 더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고 당차게 말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들 때는 영화를 보거나 코인노래방에 간다는 권순우는 “이승철이나 성시경 등 예전 발라드 가수들의 노래를 주로 부른다”며 22살답지 않은 ‘아재’ 취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권순우의 활약에 한국 남자테니스도 덩달아 황금기를 맞이했다. 정현(23ㆍ한국체대)과 함께 흥행 쌍끌이가 기대된다. 권순우는 “(정)현이 형이랑은 친하지만 저까지 묶어 황금세대라고 불러주는 건 아직 부담스럽다”며 “서로 잘하는 걸 보며 따라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겸손한 말과 달리 국가대표팀에서도 당당히 에이스 자리를 꿰찬 그다. 권순우는 14, 15일 중국 구이양에서 열린 데이비스컵 지역 1그룹 예선에서는 중국을 상대로 홀로 2승을 올리며 팀의 월드그룹 예선 진출을 이끌었다. 권순우는 “데이비스컵은 축구의 월드컵과 같다. 국가대표로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이 큰 건 사실”이라면서도 “오랜만에 친한 형, 동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 홀로 투어를 다니는 것보다 훨씬 재밌어서 오히려 대표팀에서 ‘힐링’을 하고 간다”고 고백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권순우는 이제 다시 투어로 돌아간다. 다음 무대는 23일 중국에서 열리는 ATP 투어 250시리즈 주하이 챔피언십이다. 권순우는 “이제는 부상 없이 그랜드슬램 본선 1승, 랭킹 50위권 진입이 목표”라며 “요즘 들어 테니스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흔들림 없는, 꾸준한 선수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구이양=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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