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한다. 근래 아침이 아닌 시간에 퇴근해 본 적이 없다. 남들이 활기차게 출근하는 시간이 내겐 혼곤한 근무를 마친 시간이다. 운전해서 퇴근하는 차 안은 몽롱하고 공허하다. 정신이 가물거려 곧 잠들 것 같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며 간밤에 있었던 사건들이 어른거린다. 어서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그래서 어느 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동생에게도 걸고 친구에게도 걸었다. 잡담을 하거나 간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정신을 차리고 응어리를 조금 해소하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활기차게 일하거나 아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해가 중천에 있지만 혼자 깊은 심야에 있는 듯한 사람이 털어놓는,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이나 ‘유가족의 통곡’이나 ‘근육과 뼈가 흩어지’는 넋두리를 정기적으로 들어주기는 무리가 있는 시간이다. 이 전화가 누군가에게 난감한 전화임을 곧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몇 번쯤 전화하자, 어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책무를 파악하셨다. 까딱하면 잠들어 버릴 아들과 수다를 떨어 안전하게 집까지 보내는 일이다. 언제 근무라고 알려드리는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는 아침에 즉시 전화를 받아 “어젯밤 당직이었네, 얼른 가서 쉬어야지”라는 말로 통화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는 외삼촌 댁에서 밥 먹고 온 이야기를 하고, 나는 한강에서 건져 온 시체 이야기를 하는 식이지만, 통화는 그럭저럭 즐겁다. 어머니는 십 년 넘게 들어서 지긋지긋할 사고 이야기도 처음처럼 들으신다.
하나 그 시간에 졸린 건 나뿐만이 아니다. 어머니도 하루를 시작해야 하고 전화를 받아 잠에서 깨시기도 한다. 그럴 때의 통화는 중구난방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어머니도 갑자기 어제 뭐 했느냐고 묻기도 하시고(당연히 당직을 섰다), “어디쯤 왔냐”는 질문을 서너 번 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가끔 피곤하거나 귀찮은 기색에도 어머니는 내 차에서 주차음이 울리고서야 전화를 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퇴근하는 차는 매일 평화롭다. 나는 그 차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다. 개인적인 일이나 가족의 일, 과거의 추억이나 시사 현안 같은, 어떤 주제를 어떤 식으로 털어놓아도 괜찮다. 상대는 세상에서 가장 나를 배려해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나는 방금 전까지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까지도 쏟아내고,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가장 생생하게 전달받는 사람이 된다. 가끔은 간밤에 아내를 잃은 남편의 통곡을 설명하다가 같이 울기도 한다. 그럴 때 어머니는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법이란다” 같은,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답변을 하신다. 그런 순간에는 바깥의 날씨까지도 생생한 것이 된다. 그렇게 그 전화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종류의 전화일지 모른다. 자식은 아침마다 위험에 처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항상 구해서 건져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늙어버린 나는 어떤 순간을 추억하며 살아갈까. 처음 의사 면허를 받은 순간이나, 처음 서점에서 내가 쓴 책을 집어 든 순간일까. 그 순간들은 강렬했지만 당연해져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하지만 힘든 밤을 보내고 맞은 아침 공기를 들이켜며 혼곤한 정신을 붙들고 거는 전화, 나를 지키려는 어머니의 음성과 곧 잊어버릴 잡담들, 수없이 바뀌어 하루도 같지 않던 날씨들, 그 강변과 담벼락과 수많은 차와 부슬거리는 빗줄기와 밥은 먹었냐고 묻고 웃던 장면.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경험하고 있지만, 이것이 영영 기억에 남아 그리워하며 살 것임을 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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