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경고음이 높아지자 부동산 시장에도 “투자심리 악화로 집값이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때처럼 국내 집값이 단기간에 폭락하진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완만한 조정 가능성에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커지는 디플레 우려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까지 누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5%로 1965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소비자물가는 올해 1월 0.8%를 기록한 이후 계속 1.0%를 밑돌다가 지난달에는 -0.04%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에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디플레이션은 경기가 둔화되는 가운데, 물가상승률이 상품과 서비스 전반에서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0%를 밑도는 현상을 말한다. 자산시장 불안 등의 충격으로 수요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경제 전반에 악영향이 증폭된다. 기업이 신규투자와 생산을 축소함에 따라 고용이 감소하고, 임금이 떨어지면 가계가 소비를 미뤄 내수 부진이 심화하면서 디플레이션이 더욱 깊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D의 공포’로 불리는 디플레이션 여파가 주택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크다. 통상 디플레이션이 상황이 닥치면 화폐가치는 상승하고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 가치는 하락한다. 그렇지 않아도 미ㆍ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경기 위축,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확대 적용으로 인한 투자심리 위축 등 부동산을 둘러싼 시장 여건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에서, 그나마 저금리 기조를 타고 주택으로 향하던 시중 유동 자금이 디플레이션 우려로 빠져나갈 경우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을 수 있다는 의미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저성장ㆍ저물가에 분양가상한제 도입 영향이 겹치면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는 다르다지만
집을 사거나 팔려는 사람들 역시 경기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동산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요즘 집값이 상승 분위기라 시장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매물을 내놓으려 했는데 늦기 전에 빨리 현금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매도자의 질문과 “지금 집을 살지, 전세로 들어가고 디플레이션으로 집값이 바닥을 찍었을 때 매수할지 고민”이라는 수요자들의 질문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경기가 악화될 때마다 끊임없이 거론되는 집값 폭락설 역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일본은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 거품(버블)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 물가 상승률이 하락세로 돌아선 이후 20여년간 만성적 디플레이션에 빠졌다. 1992년부터 2016년까지 일본 주택가격의 누적 하락률은 53%에 달한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정부는 일본과 같은 실물 자산의 붕괴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일본에 디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부동산 등 자산 시장에서 상당한 버블이 있었는데 한국은 이 같은 거품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변동성이 초래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밝혔다. 시장 전문가들도 현재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과 저금리 기조를 감안하면 당장 일본 같은 집값 폭락은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거시경제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집값만 ‘나홀로 성장’을 유지하긴 어려운데다, 장기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경우 거래가 줄면서 시장이 냉각될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원갑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부동산은 단기적으로는 펀더멘탈(기초체력)을 반영하기보다 시장 참여자의 ‘집단적 기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당장 소비자 물가 하락과 집값을 연결시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면서도 “다만 실물경제가 위축되면 근본적으로 집값이 오르긴 어렵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집값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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