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 속 한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 1995년 초연된 후 전 세계의 주목을 끈 영국 안무가 매슈 본의 ‘백조의 호수’. 이 작품의 묘미는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백조 역할을 남성들에게 맡겼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클래식 발레로 꾸려졌던 ‘백조의 호수’에 뮤지컬 요소를 듬뿍 가미했다는 점은 더 큰 매력 요소다. 왕자 역의 무용수는 차이콥스키 곡 ‘백조의 호수’가 흐를 때 춤 대신 무대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신의 감정을 얼굴과 몸으로 연기한다. 여성 무용가들은 무용복이 아닌 투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춤을 춘다.

#. 프랑스ㆍ독일 안무가로 꾸려진 왕 라미레즈 컴퍼니는 힙합과 발레, 스트리트 댄스와 현대무용을 혼합한 ‘보더라인’으로 세계 곳곳에서 극찬을 받고 있다. 발레 특유의 우아한 몸짓과 ‘윈드밀(비보이들이 땅을 짚고 몸을 풍차처럼 돌리는 동작)’ 같은 역동적인 움직임이 동시에 등장하는 작품으로 새 안무 문법을 제시하고 있어서다.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성 안무가가 현대 리듬에 맞춰 가녀린 춤을 추다가, 별안간 치마를 걷어 올린 후 무릎보호대를 한 채로 관절을 꺾는 듯한 격한 춤을 추는 독특한 형식이 이어진다.

뮤지컬을 닮은 발레, 힙합과 혼합된 현대무용 등 여러 장르가 결합된 작품들이 올 가을 한국을 찾는다. 무대와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국내외 공연계의 꾸준한 시도가 반영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다.

왕 라미레즈 '보더라인' 속 한 장면. 왕 라미레즈 유튜브 캡처

매슈 본은 원작 스토리를 과감하게 각색해 ‘댄스 뮤지컬’이라는 새 장르를 등장시켰다. ‘백조의 호수’(10월 9~20일 내한) 속 배우들은 대사가 없지만 안무만큼이나 연기에 공을 들여야 한다. 의상이나 소품도 뮤지컬 방식에 가깝다. 의자, 침대, 책, 종이 같은 소품을 자유자재로 다뤄야 하고, 발레 공연에서 좀체 등장하지 않는 발등을 덮는 드레스와 정장도 입는다. 전문 안무가가 아닌 뮤지컬 배우들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주연 ‘백조’를 맡은 윌 보우지어는 리허설 인터뷰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 내게 백조의 호수는 완전 새로운 경험”이라며 “발레와 현대무용, 뮤지컬이 각각 섞인 결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더라인’(10월 18, 19일 내한)에도 발레리나뿐만 아니라 비보이, 현대무용가들이 섞여 등장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독일로 이민 간 왕혼지(한국명 왕현정)가 주축이 돼 서양과 동양적 요소가 결합하는 특징도 있다. 무용수들은 몸에 케이블을 달고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데, 힙합 리듬에 맞춰 여린 선의 전통무용과 굵직한 스트리트 댄스를 번갈아 춘다. 왕 라미레즈 컴퍼니는 ‘보더라인’을 “안무가의 기량, 시적 표현, 정체성 고민을 관통하는 새로운 몸의 언어에 대한 탐색”으로 정의하고 있다.

매슈 본 '백조의 호수' 속 한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국내 작품들의 실험도 눈길을 끈다. 지난달 개막한 뮤지컬 ‘시티오브엔젤’(10월 20일까지)은 영화적 요소를 가져왔다. 무대 등장인물들이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영화 속 배우 역할을 겸하는 형식이다. 현실과 영화 속 장면을 구분 지어 표현하기 위해 컬러(현실)와 흑백(영화)의 조명 기술을 번갈아 사용하고, 카메라 조리개가 열렸다 닫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 무대 장치도 마련됐다. 전통음악팀 왓와이아트(WhatWhyArt)는 다음달 19, 20일 공연 ‘상사의-죽음에 관한 삶의 음악’을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올리는데, 해금과 장구 등 전통악기로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동시에 애니메이션, 옴니버스 형식 퍼포먼스를 곁들인다.

뮤지컬 '시티오브앤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무대와 주제의 한계를 넘어 새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실험 정신이 새로운 장르 결합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장광열 무용평론가는 “관객들에겐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고전과 전통의 틀을 깨기 위한 시도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며 “조명, 음향 기술이 진화하고 작품의 서사보단 개념적 의미 전달에 방점을 찍는 형식이 주류가 되며 다양한 결합이 가능해졌다”고 분석했다. 매슈 본 역시 1995년 고전 ‘백조의 호수’를 현대 배경으로 각색한 이유로 “관객이 떠올리는 고전 ‘백조의 호수’에 대한 기존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다”고 여러 차례 털어놓은 바 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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