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100회 전국체전의 마스코트인 해띠ㆍ해온의 조형물이 조성돼 시민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열리는 건 33년만이다. 고영권 기자

영화 ‘YMCA 야구단’(2002년 개봉)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일제 강점기 해외 유학을 통해 신여성이 된 여인과 암행어사를 꿈꾸다 과거제 폐지로 삶의 방향을 잃은 청년, 신분제가 무너진 뒤 설 자리를 잃은 양반과 노비 출신 서민 등이 모여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을 꾸린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근대 스포츠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주로 선교사들을 통해 소개되면서 싹트기 시작했다. 실제 YMCA 야구단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YMCA 야구단으로 출발한 한국 야구는 올해 100주년을 맞은 전국체전 역사의 시작을 장식하기도 한다.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1920년 7월 창립되며 그 해 처음 개최한 대회가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당시 중학단(5년제) 5개 팀, 청년단(일반부) 5개 팀이 참가했고, 관중들에게 대인 10전, 소인 5전씩의 입장료를 받아 최초의 유료 경기가 치러졌다.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전조선’이란 이름을 덧댄 대회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1923년에 열린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엔 인력거꾼, 우편배달부, 신문배달원 등은 참가할 수 없다는 우스꽝스러운 조항도 붙었다. 평상시 다리 힘을 많이 쓰는 직업 종사자의 육상경기 참여는 아마추어리즘에 위배된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나름 프로와 아마의 구별이었던 셈이다. 근대 체육이 막 정착되는 때라 장비도 취약했고, 규칙도 명확하지 않아 곳곳에서 혼선을 빚곤 했다.

일제에 의한 조선체육회의 해체로 38년 이후 열리지 못한 대회는 광복 후 곧바로 재개됐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열리며 전국체전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확인시켰다. 피란으로 전국에 흩어진 체육인들을 수소문 해 1951년 10월 광주에서 2,0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대회를 치러냈다.

전국체전의 전성기는 1960, 70년대였다. 전국민의 관심 속에 각 시도는 종합순위를 놓고 자존심을 건 대결을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를 고비로 전국체전의 열기는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야구 축구 등 인기 종목이 프로화하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으로 국민 눈높이가 올라가며 자연스럽게 전국체전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우리 근현대사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전국체전의 100회 대회가 10월 4일 서울에서 개막된다.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다시 열리는 것도 33년만이다. 서울시는 임진각과 마라도, 독도에서 성화를 채화하고, 잠실에서 대규모 불꽃놀이를 펼치는 등 성대한 100살 잔치를 준비 중이다.

지난 100년간 전국체전은 국내 우수 선수 발굴과 육성의 산실이었다. 선수들에게는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용문이라 남달랐다. 이러한 전국체전의 성과로 한국 체육의 위상은 높아졌고,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도 있었다.

한국 스포츠는 그간 놀라운 성과를 냈지만 해결해야 할 적지 않은 숙제를 안고 있다. 성적 지상주의와 엘리트 체육 중심의 기형적 성장은 선수들의 인권침해, 부정과 비리 등 많은 문제와 한계를 노출시켰다. 성적만 앞세워 고립된 섬처럼 버티다 사회가 변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금메달 몇 개에 목매는 시절은 지났다. 이젠 스포츠강국에서 스포츠선진국으로 도약할 때다. 엘리트 체육도 생활스포츠의 토양 속에서 발전돼야 하고 학교 운동부, 실업팀, 스포츠클럽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선수가 육성되는 선진적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국체전도 국민들의 관심을 다시 얻기 위해선 엘리트 선수들만의 무대가 아닌 생활체육을 포함하는 국민체전의 장으로 전환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볼 만하다.

전국체전 100년은 또한 한국 스포츠 100년의 성장사다. 한 세기의 축적을 넘어 이젠 새로운 변화가 절실하다. 등 떠밀려 혁신의 흉내만 낼 게 아니라 새로운 100년을 열 제대로 된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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