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의 스파이전략 사례
김석성(金石星·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산업‘스파이’전은 우리나라에도 상륙, 그동안 그들의 활약상(?)은 신문지상에도 여러 번 보도된 바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파리’의 세계적인 의상가 ‘크리스천 디올’이 미국의 산업‘스파이’왕 ‘웰몬트 카밍’에 의해 한 대 얻어맞은 얘기 하나가 있다. 세계의 ‘뉴 모드’는 ‘시즌’에 앞서 ‘파리’에서 열리는 ‘디올’의 신작 발표회에 따라 물결처럼 흐르는 것이 상례. 그러나 어느 가을의 ‘뉴 모드’가 아직 파리에서 발표되기 전에 뜻밖에도 미국의 의상 잡지에 대대적으로 발표되어 세계에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반 년 뒤 그 전모가 밝혀졌지만, ‘카밍’의 지시를 받은 부하 하나가 의상 연구생으로 가장하여 ‘디올’연구실의 단골 양복지 상인에 접선, 1년 이상의 공작 끝에 작품을 ‘스파이’했던 것이다. 이것은 외국 산업‘스파이’의 한 예.
기업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작년부터 이에 못지않은 산업‘스파이’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법도 갖가지. ‘스파이’ 방법은 ‘라이벌’ 회사의 특허, 비법, ‘뉴 아이디어’, 인사조직, 자산과 신용의 정도, 판매 방법과 ‘루트’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대 회사에 ‘테러’ 행위까지 자행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기업 사이에 최근 ‘대외비’란 결재 철(綴)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일까?
이제 ‘007붐’은 어느 기업 전선에도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사당국과 ‘매스컴’에 의해 밝혀진 우리나라 산업‘스파이’의 형태도 여러 가지.
가발‘샘플’ ‘스파이’ 사건
인기 품목인 가발 ‘샘플’을 훔쳐 ‘라이벌’ 회사에 넘겨준 ‘스파이’의 예. 그러던 중 일본에 보내 특수기술 훈련까지 시켰던 동사 혼모반 주임 김모씨가 돌연 65년 10월 23일자로 사표를 내던지고 ‘라이벌’ 관계에 있는 미성가발양행(서울 성수동)의 화공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회사의 가발 제조기술이 ‘스파이’당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김씨는 서울통상의 초창기인 62년 11월 27일자에 입사한 착실한 중견사원.
64년 1월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 동안 가발염색 기술을 배운 뒤 영등포공장의 염색주임 자리에 올랐다. 이를 알아낸 미성 측은 김씨에게 끈덕진 유혹의 ‘스카우트’를 해 왔다. 회사에서도 눈치를 챘는지 7월 15일자로 그를 익숙하지 않은 혼모반 주임 자리로 돌연 옮기게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씨는 드디어 미성가발로 옮기기로 결심, 10월 20일 퇴근길에 공장 ‘네트’반에서 가발제조용 ‘나일론 네트’ 1개(시가 산정 못함)를 훔쳐 미성 측에 넘겨주었다.
다시 그는 작년 1월 6일 전부터 그를 잘 따르던 미성통상 여공 소(蘇)모(21세, 영등포구 신길동)양을 시켜 2차에 걸쳐 새 ‘컬러’ 제품 8꼭지를 훔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씨의 ‘스파이’ 행위는 이내 들통 나 그는 서울통상 측의 고소에 의해 절도, 절도교사 및 업무상 배임죄로 구속당하고 말았다. 서울통상 측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때문에 서울통상은 7백만 원의 손해를 본 대신 미성가발양행은 2백86만 원의 부당이득을 봤다고 했다.
이 ‘가발 샘플 스파이 사건’을 심판했던 서울형사지법 최광률 판사는 김씨에게 절도 및 절도교사죄를 적용 벌금 1만 원을, 소양에게는 벌금 2천 원을 물도록 판결했으나, 김씨에 대한 업무상 배임 죄목은 무죄로 판시했다. 공판 도중 이들의 변호인들은 훔친 ‘네트’ 1개, 머리꼭지 8개는 시가 모두 10원 미만이라고 주장,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변호했으나, 최광률 판사는 “비록 경제적 가치가 적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주관적 가치가 큰 경우 절도죄의 객체가 된다.”고 판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에 반해 업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서는 김씨가 “이미 사표를 내어 서울통상을 퇴직함으로써 적어도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아니었다.”고 보고 무죄 판결. 이 사건은 현재 검찰이 항소함으로써 서울형사지법 항소부에 계류 중이다.
영진공업 파괴사건
65년 5월 어느 날. 군산시 장재동에 있는 영진공업사의 송수관 제조공장의 ‘모터’에 불이 났다. ‘모터’뿐만 아니라 주철관 제품들인 ‘몰드(mold 또는 mould; 型板)가 녹아나고 녹이 스는 등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 당시 영진공업은 대구시청에 납품키로 계약된 450개의 상수도 주철판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공장을 움직여야 할 형편이었다. 박 사장은 낭패의 한숨뿐.
납품도 제대로 못한데다 공장의 시설을 당장 갈아치울 재력마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세는 9월이 지나기 전에 문을 닫을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멀리 부산에서 승리의 건배를 올린 한 패들이 있었다. 이들은 57년 공장을 세운 이래 그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우리나라 수도관 제조를 독점해 온 한국주철관공업회사의 간부급들. ‘라이벌’인 영진공업은 이들의 ‘스파이’ 작전에 그대로 말려들어 망하고 만 것이다.
부산동부경찰의 수사에 의해 밝혀진 이들의 ‘스파이’ 작전은 거의 빈틈없는 ‘테러’ 수법에 가까웠다. 한국주철관 측에겐 62년께부터 큰 골칫거리가 생겨났다. 호남지방에 난데없이 영진공업이 나타나 대대적으로 수도‘파이프’를 생산했기 때문. 지금까지 독점적으로 배를 내밀었던 돈 줄기에 금이 간 것이다. 그들은 ‘라이벌’을 없애기 위해 65년 2월 제1단계의 ‘스파이’ 작전을 벌였다. 자기 회사의 기술자인 오모 씨 등 3명을 영진공업에 미리 입사시켜 모든 정보 제공과 내부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어 2단계로 2월 말, 경비원 전모 씨를 군산에 보내어 영진공업의 현장감독 김 모 씨를 10만 원으로 매수, 그 때 영진공업에서 4월 11일자까지 대구시청에 납품키로 한 450개의 수도관을 납품기일 안에 못 만들도록 태업을 시키고 부러 파손품과 불량품을 많이 내게 했다.
제대로 계획에 성공한 한국주철관 측은 제3단계 작전으로 파괴 공작에 착수, 미리 밀파한 기술공 오현포 씨에게 8만 원을 주어 65년 5월 초산과 염산을 ‘몰드’형(型, 시가 80만 원)에 뿌려 시설을 못 쓰도록 하는 한편, ‘모터’에 불을 질러 파손시켰다.
이 때문에 영진공업은 사세가 기울어지기 시작, 그해 9월 중순 문을 닫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주철관은 마지막 단계로 영진공업을 자기 회사로 폐합하는 공작을 벌여 영진공업의 쓸 만한 기술공을 모두 흡수, 드디어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약 1천만 원을 들여 파괴했던 공장시설을 정비하고 기술공들을 정비, 명실공히 한국주철의 분공장으로 손질을 끝냈다. 이 ‘스파이’ 작전은 그 뒤 처음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던 박 모 씨 등 3명이 당초 “일이 끝나면 우대하겠다.”는 회사의 약속이 달라지자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세상에 밝혀진 것이다.
일상(日商)에 정보 제공한 사설 흥신소
작년 4월 8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흥신업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던 무허가 흥신소 사장 박모(서울 공덕동) 씨의 산업 스파이 활동은 주로 일본 상사와 거래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체의 운영 상황, 무역 실적, 시설과 노임 문제 등을 탐지, 일본 상사 측에 정보를 팔아먹는 일이었다. 박씨는 일본 대학을 졸업한 일본통. 해방 후 경찰에 투신, 5.16 직후 충북도경 정보계장 직을 물러나기까지는 ‘베테랑‘ 정보경찰이었다.
그는 부하인 김모 씨와 함께 서울 당주동 48번지에 ‘아지트’를 두고 치밀한 ‘스파이’를 했다. 자산 관계는 지방법원 등기과에서 등기부를 열람, 이를 복사했으며 무역 실적은 주로 한은 조사부를 통해, 회사 실태는 무역협회를 통해 조사를 마쳤다. 1건의 처리 기간은 약 1주일. 1건당 4~5천 원씩 받았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그가 접선한 일본 상사는 이토츄(伊藤忠), 마루베니니이다(丸紅飯田), 미쓰이(三井)물산, 미쓰비시(三菱)산업, 아다카(安宅)산업, 노무라(野村)물산, 이와이 (岩井)산업, 도요멘카(東洋棉花) 등이었고, 조사 대상이 되었던 국내 상사는 대림산업, 효성물산, 국일상사, 대한사진공업, 금성사, 유린실업 등 수십 개 사에 이르렀다.
경찰은 그 당시 박씨가 산업‘스파이’ 활동을 한다는 정보를 얻고 열여섯 번이나 수검(搜檢) 명령을 내렸으나 그가 번번이 거절했기 때문에 강제수사에 착수, 그를 구속하게 된 것. 박씨는 작년 9월 17일 서울형사지법 나석호 판사에 의해 흥신업단속법 위반 죄명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현재 항소 중에 있다.
부자간에도 ‘스파이’전
그밖에 ‘사카린’ 제조업계의 착실한 기업으로 커 나온 금북화학(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소재)이 한비(韓肥; 한국비료)로부터 OTSA(*사카린 원료)를 사들여 말썽이 된 사건의 발단도 따지고 보면 산업‘스파이’ 망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작년 5월 초순 어느 날 금북화학은 거래관계로 사이가 벌어진 조미료 제조업체 M사의 정보원에 의해 OTSA를 운반한 현장을 ‘카메라’에 붙잡혔다는 것. 이 사실을 M사 정보원은 부산세관 감시과 직원 S씨에게 증거로 제시, 세관당국의 수사를 받게 됐다는 소문도 났었다.
한때 대한재벌의 설모(대한전선 사장) 씨와 그의 아들(대한방직 사장) 간에 일어났던 재산권 쟁탈전에도 ‘스파이’ 수법이 등장됐었다. 작년 5월 23일 아들 설모 씨의 아들은 5명의 심복을 시켜 6일 동안 아버지가 집무하는 대한전선, 대동제당의 사장실 및 업무부장실의 각 전화 배선에 도청장치를 달아 6백 ‘피트’의 ‘테이프’에 대한전선의 기술 제휴, 거래 계약고 등 업무 기밀을 녹음했다는 것이다.
또 이 녹음 ‘테이프’ 속에는 모 수사 기관원이 “우리가 조사하는 동안 빨리 아들을 걸어 민사소송을 내라.”고 말한 내용이 엉뚱하게 잡혀서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찰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기업의 자유 원칙은 경쟁을 일으키기 마련. 이 때문에 독점의 정상을 자랑하는 기업은 서로 선의이거나 악의이거나 간에 ‘라이벌’ 회사의 일거일동을 정탐할는지 모른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의 경우 히타치(日立) 회사는 각 부 회의를 통한 강력한 애사심을, 도요(東洋)레이온은 ‘특허방위 담당자 제도’, 아이키(愛知)기계공업은 사장 직속의 ‘특허사원 조직’을 두고 외부의 ‘스파이’ 활동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로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업들, 예를 들면 동양맥주 대 조선맥주, 경남모직과 한국모직, ‘롯데’라면 대 삼양라면, 해태제과 대 동양제과, 천광유지 대 애경, 무궁화유지, 건설화학 대 삼화페인트, 한국케이블 대 대한전선, 동양정밀 대 금성사, 제일제당 대 삼양사, 아이디알 미싱 대 드레이스 미싱, 한국타이어와 흥아타이어, 조광와이셔츠 대 시대와이셔츠, 금강스레트와 한국스레트,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대한전척공사, 유한양행과 유유산업 등등 그밖에 많은 회사들이 만만찮은 사이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사이의 기업들이 선의의 경쟁 한계를 벗어날 때, 서로의 기업 안전을 위해 어떠한 사업조직을 펼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노릇. “하나의 기업은 언제나 상대 기업으로부터 노려지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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